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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첫 상담받은 날

by Summer_bom 2023. 12. 23.


태어나서 진정으로 필요하다고 느껴져 처음으로 심리 상담소를 찾았다. 마침 '서늘한 여름밤의 추천 리스트'에 회사에서 가까운 곳이 있었다. 목요일 저녁에 예약을 하고 다음날 저녁에 방문했다.

수요일에서 목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그와 통화하며 내 감정을 필터 없이 마구 쏟아내었다. 무시하는 말, 멸시하는 말, 약점을 공격하는 말들. 내가 상처받았다고 해서, 남을 상처 줘도 된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되는 관계라는 건 없는데. 그렇게 하면서 사실은 내가 다시 상처받았다. 감정도 해소되지 않았다. 되려 자괴감이 찾아왔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아, 또 질러버렸구나.

너는 이런 벌을 받아야만 해. 왜냐면 너는 나를 상처줬으니까. 네가 미안하다고 해도 소용없어. 나는 너를 공격하고 상처 주고 싶어. 내가 그러고 싶을 때까지, 네가 받아낼 때까지 할 거야. 견디기 힘들어 떠나면 그것도 미워하고 저주할 거야. 내가 이렇게 해도 나를 받아줘.

못난 마음이다. 모든 걸 지우고 나면 결국 마지막 말이 남는다. "나를 견뎌줘, 나를 받아내줘".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 마음인 지.

이 마음이 어디서 비롯된 지 퍼뜩 생각이 났다. 엄마에게만 하던 짓이다.
사실 알고 있었다. 진즉 상담을 받았어야 했다. 5년 전에 큰 가정사가 있었다. 그때 상담을 받으며 마음을 잘 다졌어야 했다. 당시에 진행 중이던 연애가 더 소금을 뿌렸었다. 그 사람은 한껏 약해진 나를 찌르고, 칼집을 냈다. 그렇게 마음은 더 폐허가 되어 공격과 방어력이 강화되었다. 더 일찍 들여다봤어야 했다.

그 때 엄마에게,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응어리로 남아 내 방패가 되었다. 그 방패는 비슷한 미묘한 신호가 발견되면 곧장 방어와 공격태세에 돌입한다. 최근의 연애는 나를 더 많이 보여주고, 받아들여지면서 감정적으로 더 밀착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다양하고 솔직한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었다. 지금같이 나의 바닥도 드러나져 버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라는 책을 좋아한다. 그 저열하고 지질하고 안타까운 수기를 보면서 나도 한 치 비밀도 없는 일기를 쓰고 싶었고, 그러다 누군가에게 들켜버리고 싶었다. 그런 나를 사랑해 주는 걸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욕망이 가장 컸다. 결국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이다.

여전히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미안하다는 말, 보듬어주는 말, 이해한다는 말, 화내는 말 모두.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상처를 주는 나를 보며 내가 상처받았다.
지금이라도 돌보지 않으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나는 이 상처를 재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나를 먼저 챙기기로 했다. 얼마큼 괜찮아질지, 과연 괜찮아질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내가 힘들다고 친구들의 좋은 시간을 뺐고, 그에게 상처 주며 내가 다시 받는 걸 안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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