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진정으로 필요하다고 느껴져 처음으로 심리 상담소를 찾았다. 마침 '서늘한 여름밤의 추천 리스트'에 회사에서 가까운 곳이 있었다. 목요일 저녁에 예약을 하고 다음날 저녁에 방문했다.
수요일에서 목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그와 통화하며 내 감정을 필터 없이 마구 쏟아내었다. 무시하는 말, 멸시하는 말, 약점을 공격하는 말들. 내가 상처받았다고 해서, 남을 상처 줘도 된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되는 관계라는 건 없는데. 그렇게 하면서 사실은 내가 다시 상처받았다. 감정도 해소되지 않았다. 되려 자괴감이 찾아왔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아, 또 질러버렸구나.
너는 이런 벌을 받아야만 해. 왜냐면 너는 나를 상처줬으니까. 네가 미안하다고 해도 소용없어. 나는 너를 공격하고 상처 주고 싶어. 내가 그러고 싶을 때까지, 네가 받아낼 때까지 할 거야. 견디기 힘들어 떠나면 그것도 미워하고 저주할 거야. 내가 이렇게 해도 나를 받아줘.
못난 마음이다. 모든 걸 지우고 나면 결국 마지막 말이 남는다. "나를 견뎌줘, 나를 받아내줘".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 마음인 지.
이 마음이 어디서 비롯된 지 퍼뜩 생각이 났다. 엄마에게만 하던 짓이다.
사실 알고 있었다. 진즉 상담을 받았어야 했다. 5년 전에 큰 가정사가 있었다. 그때 상담을 받으며 마음을 잘 다졌어야 했다. 당시에 진행 중이던 연애가 더 소금을 뿌렸었다. 그 사람은 한껏 약해진 나를 찌르고, 칼집을 냈다. 그렇게 마음은 더 폐허가 되어 공격과 방어력이 강화되었다. 더 일찍 들여다봤어야 했다.
그 때 엄마에게,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응어리로 남아 내 방패가 되었다. 그 방패는 비슷한 미묘한 신호가 발견되면 곧장 방어와 공격태세에 돌입한다. 최근의 연애는 나를 더 많이 보여주고, 받아들여지면서 감정적으로 더 밀착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다양하고 솔직한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었다. 지금같이 나의 바닥도 드러나져 버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라는 책을 좋아한다. 그 저열하고 지질하고 안타까운 수기를 보면서 나도 한 치 비밀도 없는 일기를 쓰고 싶었고, 그러다 누군가에게 들켜버리고 싶었다. 그런 나를 사랑해 주는 걸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욕망이 가장 컸다. 결국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이다.
여전히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미안하다는 말, 보듬어주는 말, 이해한다는 말, 화내는 말 모두.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상처를 주는 나를 보며 내가 상처받았다.
지금이라도 돌보지 않으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나는 이 상처를 재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나를 먼저 챙기기로 했다. 얼마큼 괜찮아질지, 과연 괜찮아질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내가 힘들다고 친구들의 좋은 시간을 뺐고, 그에게 상처 주며 내가 다시 받는 걸 안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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