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부지와 선생님, 서로가 너무 많이 사랑했다는 거예요. 절 사랑한 게 아니에요.
두 분하고 함께 있을 때마다 버림받은 기분은 제가 가져야 했다구요. 진짜루요.”
기대치 부합 95%
먼저 ‘은교’는 영화로 먼저 접했지만 영화는 지금도 보지 않았다. 박해일이 할아버지 분장을 한다고 해서 '오 흥미로운데?' 라며 눈여겨 봤었다. 더불어 김고은의 캐스팅으로 상당히 주목받았기에 알고 있었다. 주변에서 영화를 보고 난 후 ‘충격적이다’ 라는 말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알라딘을 구경하다 운 좋게 상태가 좋은 책을 발견해서 곧바로 구입을 했다. 책 표지가 보라색인 것도 큰 몫을 했지. 고전문학을 주로 읽던 시기였는데 비교적 최신의 한국 소설을 읽으니 그렇게 빨리 술술 잘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마 정서가 잘 맞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언어의 자연스러운 소통 덕분일 것이다.
시점은 3명이다. 과거를 담당하는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 현재를 담당하는 변호사. 은교는 그 3명이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으로 존재한다. 은교의 시점은 없다. 은교가 하는 말들은 모두 각 3명의 귀에서 다시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 뿐이다. 그런데 3명이 보는 은교가 모두 달랐다. 그들이 모두 보고 들었으니 은교는 실제로 존재했었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은교를 보는 시점이 있다. 그래서 소설에서 은교는 가장 입체적이다. 은교를 읽는 내내 다른 모든 인물은 허구일지라도 ‘은교’만은 정말 존재하는 것 같았다. ‘우리 4명 모두’가 은교를 알고 있지 않은가.
추천 80%
호기심에 몇 장을 읽다가, 어느새 마지막 장을 덮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양한 시점 덕분에. 또 상상력을 자극하는 상세한 묘사 덕분에. 책을 읽다가 보면 머릿속에는 내가 상상하는 ‘이미지’가 가득해진다. 모든 것이 장면과 공간으로 그려진다. 영화로 만들기에 최적인 듯하다.
시간의 흐름도 일반적으로 흘러가고 갈등의 점화와 심화, 그리고 폭발. 또 그 후에 오는 적적함의이러한 흐름은 모두 인간적이었다. 이 책의 현재는 ‘죽음’뒤, 그 적적함에서 시작한다. 나는 지금의 한은교를 볼 수있고, 과거의 그들이 가진 감정으로 투여된 한은교도 볼 수 있다.
내용은 무슨 거대한 서사적인 역사적 통찰도 아니고, 신과 싸우는 악의 존재로써의 관념적인 사유라고 보기도 힘들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사랑’을 하는 주체는 사람일 뿐인데, 왜 노인은 어린 이성을 사랑해서는 안되는가. 그 불문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뭐 나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의견을 갖고있다.
소장가치 100%
나는 책의 표지가 ‘보라색’인 책이 모인 책장을 갖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그냥 한번 들어봤던 책인데 마침 책이 ‘보라색’이면 일단 산다.
내가 묘하게 희열을 느끼는 색상. 게다가 책도 재밌다니, 당연히 소장할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아주 개인적인 이유지만.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구입할 것을 권유해요. 표지에 하드커버를 사용하고 양장제본을 했는데, 보라색이 질감에 맞춰서 잘 빠졌다. 그리고 책 제목 타이포가 색을 방해하지 않고 에쁘게 잘 자리잡은 듯한 책.
신선함 80%
이적요 시인에게 은교는 ‘판타지’이며 ‘뮤즈’ 그 자체. 또는 ‘죽음을 부르는 사자’. 서지우에게 은교는 ‘욕망의 한 대상’, 그리고 선생님과 자신을 단절시키는 ‘요망한 것’, 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들이 은교에게 느끼는 감정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말을 미리 파국적으로 설정해놓고 그 매개체로 은교를 선택했다고도 느껴졌다. 은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둘의 관계는 어떻게든 모든걸 쏟아내고 증오만을 남긴 채 사라질 것이었다, 그렇게도 생각이 들었다.
“할아부지하고 서선생님, 서로가 깊이 사랑하셨다는 거예요. 제가 낄 자리가 없을 정도로요! 제가 소외감을 느낄 정도로요!”
은교의 말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겉으로 드러난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의 개인적인 사랑외에도 또 다른, 이미 예전부터 존재했던 사랑을 은교는 포착하고 있었다. 그 사랑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이름을 지을수나 있을까. 우리는 너무 쓸데없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진 않았나 생각해 본다.
관능적이다… (…) 가슴이 계속 두근거리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적요 시인이 남긴 마지막 문장엔 뭐랄까, 차가운 폭력성이 담겨 있었다. 관능은 시간을 이기는 칼이며,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부른다는 것. (p.20)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이적요 선생님. (…) 나는 시인 이적요를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었다. (p.85)
젊은 날에 만났다면, 그리하여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터부도 없었다면 너를 만난 후, 나는 아마 시를 더 이상 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편지를 쓰면 되니까.(p.90)
“이런 식의 폭력은 안돼!” 그 말은 결국 세상을 가로질러 온 나의 나침반이 됐고, 내 평생의 중심 이데올로기가 됐다. (p.117)
그렇게 헌신해 겨우 얻은 것들을 카페 안의 저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나는 새삼 느꼈다. 화가 났다. (…) 마음대로 너희들만 누릴 권리… 없다고. (p.145)
보통 여자애. (p.163)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 나의 사랑은 (…)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 (p.203)
“할아부지와 선생님, 서로가 너무 많이 사랑했다는 거예요. 절 사랑한 게 아니에요. 두 분하고 함께 있을 때마다 버림받은 기분은 제가 가져야 했다구요. 진짜루요.” (p.217)
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이다. 내가 만난 그 날 밤의 슬픔은 후자였다. (p.234)
남은 길을 한 가지 뿐이었다. 다만 죽음을 기다리는 것. (…) 그리고 그 길은 과정이 아니라 집행되어야 할 하나의 절대적 법이라는 것.
그리하여 며칠 사이 내 몸은 십 년쯤 늙었다. (p.236)
그리고 내 무덤에 짐승이라고 침을 뱉고 살인자라고 돌을 던지라. 그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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