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강의: 나의 동양 고전 독법> 신영복 : 차분함속의 다부짐, 부드러움 속의 단단함.

by readingcats 2016. 9. 13.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어려운 동양 고전을 이보다 더 쉽게 설명할 순 없을 것 같다. 어렵다고 한 이유는 접할 기회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며, 나의 세대에서는 동양 철학보다는 서양 근대 사상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너무 쉽게 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종 인터넷 강의나 철학 입문에 관련된 책을 보면 너무 쉽게 쓰려고 노력한 탓에 너무 익숙한 비유에 휘말려 본래의 개념과는 다르게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강의>는 돌아가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다. 공자의 유가사상에서부터 노자의 노장사상, 한비자로 대표되는 법가사상, 그리고 불교와 신유학을 조금 곁들인다. 전체적인 맥락을 그 시대와 연관지어 짚어가기도 하며, 현 시대와 맞대어 비판의 잣대로 삼기도 한다.

신영복 교수님은 내내 차분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견해를 제시하지만, 본인만의 용골이 있다. 말을 유려하게 한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데, 그 속에 힘이 있어서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하고자 하는 말에 집중하게 되는 책이다.

 

500쪽이 넘는 그림 한 점없는 방대한 분량이라.. 오래 걸렸다. 뒷 부분에 불교와 신유학에 대해서는 설렁설렁 넘어가버리기도 했다. 고지가 눈 앞에 보이니 일단 끝내고 싶어서 곱씹지않고 넘겼더랬다..;;

<강의>에서는 파트가 잘 나누어져있다. 먼저 크게 정석처럼 동양철학을 나누고 그 안에서 소제목을 곁들여 숨을 잘 고르게 하였다. 그래서 좀 오랜시간 읽더라도 흐름 파악에 큰 문제가 없었다. 또 한자가 줄줄이 나오는데, 사전 한 번 안찾아보고 나름 이해하며 지나갔다. 한자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세대지만,한자 한 음의 뜻에서 시대의 고민과 사상을 음미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이렇게 말하니까 어려운 책 같은데, 절대 어렵지 않아.. 왜냐면 우리말로 쓰여졌기 때문에. 예를 들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같은 책은 어찌됏던 번역본이라 안그래도 내용도 어려운데, 내가 지금 한국어를 읽는지, 외계어를 읽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졸릴 뿐ㅎ 하지만 신영복 교수님의 <강의>는 우리 정서로 쓰였고, 또 말하는 화법으로 쓰여서 들리는 듯이 읽을 수 있다.

 

선물을 받아서 소장은 하고 있지만, 내가 과연 샀을까 라고 생각해보면 아닐 수도 있겠다. 방대한 분량을 다시 볼 엄두는 나지 않아서…ㅎ 더 큰 이유는, <강의>를 동양철학의 입문서로 읽고 유가, 도가, 불교, 법가 등을 따로 알아보면 더 유익할 것 같아서이다.

책을 읽기 전에 열린연단에서 하는 고전강연에 몇 번 갔다. 그때 <맹자>, <한비자>, <화엄경>, 이황 <성학십도> 같은 동양고전을 2시간 정도 강의로 접했었다. 그러고보니 동양고전을 접한 경험이 괘 많다. 쉬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게된 건, 최준석 교수님의 <현대 철학자, 노자> EBS인문학 특강을 보고 난 후다. 그 강의로 인해 중국의 역사와 그 사상에 대해 아주 사랑스러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추천추천. 

 

동양 철학에 대해 대강의 내용은 이전에 접해서 알고 있었지만, ‘신영복’이라는 사람을 거치고 나오는 동양의 사상들은 또 새로웠다. 서양 근대 철학에 밀려 비주류, 또는 옛것으로 치부되기도 하는 동양의 사상은 처음 시작부터 순수하다. 서양에 뿌린린 성악설, 원죄라는 것이 아애 없다. 지금의 주류인 서양과비교해보아서 ‘순수’해 보인다는 말이다.

사실 비교라는 것은 동양의 사상과 맞지 않다. 동양의 이데아는 ‘자연’이다. 있는 그대로가 가장 최고의 경지. 사람이 인위적으로 건들거나 바라보는 순간 모든 사물은 가짜가 된다. 심지어 ‘이름’도 그렇다. 개념화하여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계에 다다랐다고 평가되는 서양 사상의 대체자로 부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동양 사상은 시점과 공간의 전환의 연속이다. 생성이라고 한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진보가 아니라 다시 돌아간다는 역사적 관점을 이해하는 것은 꽤 힘들었다. 그런 점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잘못해석하는 것은 서양의 관점이다. 인간은 현재 상황에 적응한 동물이라는 것이 진화론의 요지인데, 서양에서는 사람을 원숭이에서 더 진보한 의미로 해석한다. 그런 연유에서 함부로 백인이 흑인을 탄압했다는 것은 정설.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있다. 내용도 물론 좋지만, 제목이 참 맛깔난다..!! 동양의 관점을 그대로 담고 있달까. 서구화에 익숙해진 나에게 동양의 관점은 아직 새로움과 신비함이다. ‘시간’과 ‘사건’을 너무 좁게 바라보고 갇혀살았던 것은 아닌 지 나에게 비추어 보게 된다. 

 

 

 


 

 

모든 관점은 일정하게 당파성을 띱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실천적 관점입니다. (p.33)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과정이 무너집니다. (p.39)

그러나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61)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p.76)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p.77)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p.89)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p.107) 

동양사상은 기본적으로 땅의 사상이며 모성의 문화라는 것이지요. 빈부라 하여 빈을 앞세우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p.126)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p.129) 

과거의 담론을 현재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p.141) 

나무가 변하지 않고 사막이 변하지 않고 하늘마저 변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대지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시간은 실재의 변화가 걸치는 옷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p.147)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 새로운 문명은 이 동의 논리와 결별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p.165)

경험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p.182)

오늘날 우리는 서슴없이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그 본성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포섭되어 있는 것입니다. (p.223)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p.253)

무와 유는 둘 다 같은 것인데 이름만 다르다는 것(…) 무릇 차이란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 지나기 않는다는 것. (p.267)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곳에 노자의 세계가 있는 것이지요. 개념이란 그릇은 작은 것(…) 그릇으로 바닷물을 뜨면 그것은 이미 바다가 아닙니다. (p.269) 

유무, 난이, 고저, 장단은 비교할 것이 아니지요.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p.277) 

간디는 “진보란 단순화이다”라고 했습니다. (p.304)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p.317)  

‘생명 없는 질서’보다는 ‘생명 있는 무질서’를 존중한다는 것이지요. (p.320)

내가 기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사실때문입니다. (p.332)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형과 색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과 성일 뿐이다.” -장자 (p.338) 

“나는 쓸모 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p.342)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꺠다는 것(…)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
모든 사물은 이이일의 관계, 즉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 상호침투하는 것이지요. (p.346-347) 

단 한줌의 의로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 그러나 전쟁을 용인하는 한 그것이 어떠한 논리로 치장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기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쁜 평화가 없듯이 좋은 전쟁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p.379)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p.452) 

“교묘한 속임수는 졸렬한 진실만 못한 법이다.” – 한비자 (p.457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p.460)

우리들이 갇혀 있는 좁은 사고의 함정을 깨다는 것(…) 개인이 갇혀 있는 분별지를 깨달아야 함은 물론이며 한 시대가 갇혀 있는 집합표상, 즉 업을 깨닫는 일입니다. (p.475)

우리는 우민화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는 상품문화의 실상을 직시하는 것에서 비판 정신을 키워가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p.507)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p.510)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p.515)

 

저장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