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특별판 디자인으로 책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 그렇게 된다면 번역이나 주석이 불편하긴 해도, 꼭 살텐데.

셰익스피어의 5대 희곡은 한번에 모두 읽은 적이 있다. 이젠 기억에선 많이 희미해졌긴 해도..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리어왕’으로 처음 접했다. 한꺼번에 다 읽을까, 했었는데 아무래도 희곡은 현대 감성과는 좀 달라서 읽기 힘들수도 있겠다는 섣부른 판단때문이었다.

어쨋든, 그런 편견은 사라졌고 모든 비극을 소장하리라 마음먹었다. 현대에 이렇게 재미있게 읽힌다는 이유만으로도 셰익스피어가 최고의 고전 작가인 이유는 충분한 듯하다.

리어왕의 개인적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기엔 그들에겐 딱히 가족애라는 건 돋보이지않는다. 오히려 가족애의 파멸에 가까운 이야기다. 보다 보편적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오해, 그리고 욕망이 소설속에 녹아있다.

욕망은 먼저 ‘부’와 ‘명예’로 분출된다. 욕망이 강한 자, 부를 가질 것이오,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자, 명예를 쥐는 것이다. 그가 태어나고 600년이 지난 지금도 다를 바 없다. 인간의 역사는 늘 지금이 위기고 절체절명의 순간이라고 했던가. <리어왕>에서 보여지는 가족애의 몰락은 역사가 끝에 다다랐음을 암시한다. ‘사랑’이 사라지고 가족이 파괴되고, 본인들만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모습.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늘 반복이었다. 인류는 늘 자신의 시대가 말세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들 열심히 사나보다..(뜬금포). 리어왕의 세 자매는 극을 위해 잠시 왕의 딸이라는 신분이 필요했을 뿐이지, 그냥 내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의 형상이었다. 사랑을 위해 사랑을 위장하는 사람도 있고, 감정을 속여 이득을 보는 것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타고난 신분에 비추어 분노하는 사람.. 그런 인물들이 극에 나와서 조금 과한 행동을 할 뿐이다. 그것이 진정 자신을 구할 정의라고 굳게 믿으면서.

당시는 ‘행동’하는 것이 지금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너무 ‘눈’이 많다. 그리고 사적 영역 경계의 희미함으로 인해 나의 행동은 들키기 일쑤다.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지금보다 생각이 굳어짐이 행동이 될 환경이었다. 각자의 인물들은 각자의 생각을 생존방식으로 택했고, 행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의 참여자로서 나섰다. 나는 그런 부분이 부러웠다. 나는 어떠한 타입의 방식이 있는가- 그리고 내 삶은 그것을 반영하는 지. 나는 또 생각만 하면서 실천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극과 희극이란 번역이 애매하다는 말들이 많다.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을 뿐이다. 슬프고 애통하게 전개되는 것이 비극이 아닌데, 우리말로 들으면 꼭 그렇게만 보인다. 실제로는 ‘카타르시스’가 비극의 중심에 있다. 슬픔, 비참함, 불안, 우울같은 마음이 해소되고 긴장상태가 이완되는 것이 비극의 중요한 역할이다. <리어왕>은 그래서 비극이다. 사실 내 삶도 비극이다. 나는 어떤 욕망을 가진 인물로, 어떻게 나의 순간을 전개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가 ‘나’여야만 한다. 슬픔도, 우울도, 긴장도, 또 아름다움도 나의 몫이어야만 나의 삶이 비극이 되는 것이다.

비극적 삶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