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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자꾸만 들추고 싶지 않은 컴컴한 곳을 들추는 지하인

by Summer_bom 2016. 9. 13.

여러분,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의식적인 무기력함이 오히려 더 낫다!
그러므로 지하실 만세!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과 <안나 카레니나> 이후로 러시아 문학에 대한 기대가 있다. 확실히 다른 문화권과는 다른 묘한 매력이 있다. 사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라는 러시아의 대문호들만으로 러시아 문학이라고 칭하는 것은 우습지만.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더 끌렸다. 그의 거리낌없는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던 것같다. <죄와 벌>을 다시 읽기 전에, 이 책, <지하로부터의 수기>부터 펼쳐들었다. 책 설명에도 나와있듯이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했기에. 그 말은 정확한 듯하다. 그 특유의 혼란스러움의 출발점이 명사로서 명시되어 있다. 가령 증오’라던지, ‘고통’, ‘자기 의지’같은 반복되는 눈에 띄는 명사들에 의해서 그의 사고와 나란히 하는데 좋은 열쇠가 된 듯하다.

 

제멋대로 적힌 듯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첫인상은 좀 당황스럽다. ‘고뇌의 찬 지하인의 일기에 걸맞게 숨김없이 자신의 고뇌를 드러낸다. 스로에게 솔직하고자 무척이나 애쓰는 익명의 지하인의 모습에서 흠칫 흠칫 놀란 적이 많다. 왜냐하면 너무나 나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지하인이 어떤 면에서는 더 나았다.

적어도 그는 교양있어보이려 하지 않았고, 본인의 어두운 면을 운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난 ‘밝은’곳에 적합하고자 얼마나 자기합리화를 해왔던가. 지하인은 생각하는 그대로 말한다. 인의 ‘사랑은 언제나 증오로 시작해 비웃음으로 끝난다’고. 보고 있으면 미친 사람같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습이 그가 ‘서 있는 이유라고 말한다. 자신의 모든 변덕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40년간 지하실에 있으면서 미쳐버린 지하인의 수기라고 생각하기엔, 우린 너무 닮아있다. 문학은 이렇게 또 나를 파헤쳐서 나를 있는 그대로 보게 만든다. 

 

틈틈히 꺼내볼 것 같다.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않고, 그래서 스스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기 싫어서 다른 모습인 척 하려 할 때마다, 생각날 것 같다. 

관념적으로 쓰지 않으려고 애쓰는 데 아직은 언어의 폭이 좁고 누가 읽는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상대방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비유가 많고 주어나 목적어가 자주 빠진다. 순서가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그런 느낌이다. 물론 사유의 깊이와 글솜씨에 있어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가 되지 않더라도 일단 쓰는 것. 본인의 생각을 그 순간, 거침없이 남기는 것. 그래서 둘러대고 싶고 부끄러운 그런 내 모습이 있더라는 것.

 

사실 별 것 없는 ‘수기’형식의 소설인 것 같기도 하다. 또 어려울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가만히 읽다가 보면, 남기기 어려운 말들이다. 극단으로 치닫은 나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남긴 것이다. 차마 꺼내지 못할, 또는 도덕적, 사회적 통념상 꺼내서는 안될 말들을 일단 뱉는 것이다.

중간 중간에 익명의 지하인이 미친 것 같은 모습들도 있었다.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깊숙이 숨어있는 내가 드러나는 것도 함께 느껴졌다. 나는 ‘사랑’하는 법은 배웠지만, ‘증오’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증오’하는 것들이 있고, 심지어 잘 숨기는 법도 ‘그냥’ 안다. 우리는 왜 증오를 멀리하고 지하실에 처박아두는가. 부정의 단어들을 꺼내기 두려워 하지만 사실, 누구나 마음속에 지하실이 있다. 지하실의 깊이와 넓이가 다를 뿐.

 

 


 

평온하게 살다가 성대하게 죽는 것, 이것은 매력, 그야말로 매력 그 자체다!(p.34)
 문명은 인간의 내면에 감각의 다양성만을 발달시켰고……,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가장 고상하게 피를 흘리게 만드는 이들이 가장 문명화된 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는가. (p.39)
자기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자신의 고유한 바람, 가장 야만적이라해도 자기만의 고유한 변덕, 때로는 정신착란까지가는 자신의 환상, 이러한 모든 것들이야 말로 어떠한 범주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모든 시스템과 이론들을 악마에게 줘버리도록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는 잃어버린 이익 그 자체다. (p.42)
욕망은 모든 삶, 즉 사유와 긁적임을 포함한 인류의 모든 삶을 반영한다. 이러한 반영 속에서 우리의 삶이 부분적으로 흘러간다 하더라도, 삶은 여전히 삶이지 제곱근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p.45)
나는 인간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가 ‘두 발로 걸어다니지만 감사할 줄 모르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p.47)
왜냐하면 저주는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p.49)
 물론 내가 여기에 고통을 위해 서 있는 것도 아니고 평온함을 위해 서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서 있는 이유는…… 자신의 변덕을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필요할 때 가질 수 있음을  보증받기 위해서다. (p.55)
여러분,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의식적인 무기력함이 오히려 더 낫다! 그러므로 지하실 만세! (p.59) 
값싼 행복이냐 고양된 고통이냐, 자, 뭐가 더 나으냐. (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