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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없는 나라> 이광재 : 120년전의 역사에 달콤함이 씌워진

by Summer_bom 2016. 9. 13.

이 길이 가장 옳았다고 확신하십니까? (…)
– 그대가 목숨걸고 나선 길이오. 의심하지 마오.

 

한달에 한 번은 한국 소설을 읽어야지라고 암묵적으로 계획을 세웠다. 11월엔 <나라없는 나라>를 읽었다. 혼불문학상을 받았다기에 당연히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다. 기대했지만 기대이상이었다.

‘삶이란 무엇인가’, 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떠다니는 질문에 형이상학적이거나 관념적 담론이 없이 직설적으로 답을 한다. 가끔 그 답을 지성이 주는 것이라 착각할 때가 간혹 있다. 그러나 이렇게 머리를 거치지 않고 가슴으로 바로 파고들어 답을 주는 인생을 만날 때면 초라해진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삶에서, 그리고 그 겨울, 함께 싸운 백성들의 창 끝에서 나는 초라해졌다.

 

역사소설이나 역사드라마를 접할 때마다 난 과도하게 몰입하곤 한다. 역사적 사실로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 면이 역사소설을 접할 때는 좋은 것같다. 이렇게 역사를 다시 들추어 보는 이유와 통한다고 생각한다. 120년전 역사적 사실을 현대에 와서 덧씌우고 혼을 불어넣는 까닭은 무엇일까.

난 역사소설이 오히려 교과서보다 애국심과 전통성에 일조한다고 느꼈다. 요즘은 애국심을 강요받는게 싫을 때가 많은데, <나라없는 나라>를 읽으면 절로 애국심이 생긴다. 애국심은 충성심과 구별해야 한다. 나라가 잘 되기 위해 그 곳에 칼 끝이더라도 춤을 추거나 싸우는 것이 애국심이 아닌가. 적어도 120년 전에 백성들은 그랬다. 그들이 싸운 이유는 반항이나 분노가 아니라, 애국심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마지막 몇 장을 다시보고 또 다시봤다. 아쉬워서가 아니라 안타까워서. 녹두장군의 달콤한 희망이 안타까웠다. 우리의 후손들이 재를 넘어줄 것이니 가던 길을 가자던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 달콤하기만 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우리는 재를 넘을 기회가 많았던가. 그러나 넘지 못하였다. 녹두장군은 안타깝게도 세상을 너무 희망적으로 보았다. 내가 회의주의자인지…; 그래서 난 역사를 동양적 관점으로 보는 쪽으로 관점을 좀 틀었다. 인간과 역사는 진보한다는 서양적 관점만을 믿기엔 정신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에..후

동학농민운동을 청소년때 교과서에서 접한 것이 전부였다. 그에 대한 대작들이 많다고들 하나, 나는 관심이 없어서 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접한 것이 <나라없는 나라>.

지배층의 탄압에 못이겨 피지배층이 일으킨 운동이라는 사실을, 그 시대적 상황과 함께 잘 녹여낸 것이 가장 좋았다. 청나라, 일본과의 외교 상황을 인물에 대입해 보는 것이 단순히 교과서에 나열된 사실만 보는 것보다 훨씬 생동감있게 느껴진다. 역사소설은 주로 언어의 어려움이 많다. 특히 한자세대가 아닌 나에게 한자로 표현되는 것들을 보면 아쉽기만 하다. 더 밀착되어 느낄수 없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역사로 된 우리나라 소설을 읽는 것이기 때문에 장벽이 되지 않는다.

 

 

 


 

 결핍이 세상을 이룰 것이다. (p.43)
—백성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나이다. 무거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백성은 준비가 되었으나 접주들만 안된 것은 아니오? (p.46)
겪음이 스승이올시다(p.50)
간신과 탐관오리를 격징하고 양이와 왜를 구축할 터이니 이십일을 가하여 말목장터로 모이라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p.56)
우리가 감사의 영을 받아 봄바람 앞에 사그러지는 전설로 보이시오? (p.66)
알지 못할 신념에 들려 벌써 춤추는 칼에 반쯤 목을 걸친 자들, 서적의 무리가 아니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하고 확고한 뜻을 세운 자들이었다. (p.67)
그러나 권세를 지키고자 이나라 저나라 바꿔가며 도움을 청하는 것은 외교라 하기 어렵습니다. (p.101)
이상하게도 자포자기 상태가 되면서 머리가 맑아졌다. (p.121)
돌아가시게. 숨어지내다 보면 세상이 열리겠지. (p.125)
옥에 갇힌 정석희는 언젠가 한번은 세상이 뒤집어질 일이라 생각하며 그런 자신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p.133)
자신의 입으로는 농군을 난당이라고 할 망정 일본 간자의 입에서 나온 그 소리는 어쩐지 모욕처럼 들렸다. (p.138)
넘고 싶다 이눔아. 되었느냐. 저 산뿐 아니라 세상 모든 재를 넘고 싶다. (p.153)
우리는 이 나라의 꼭대기에 있는 자들, 그들이 만든 제도며 심법과 싸우는 것이오. (…) 안에 도사린 두려움과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을 향한 경외감을 우리부터 베어야 합니다.(p.155)
원통합니다. 어찌 걸핏하면 제 나라 백성을 치는 일에 외병을 동원한단 말이오?(p.177)
권력을 쥔 자들이 그를 지키고자 끌어온 것인데 백성은 무엇을 얻는다고 책임을 진단 말이오? (p.182)
병사 하나가 일어나 드고 있던 소총을 바닥에 내리쳐 두 쪽을 냈다. “이것은 나라가 아니다! 나라는 없다!” (p.195)
대체 이자들은 어디서 솟아났는가. 이것이 정녕 조선 백성의 수준인가. 김학진은 공연히 두려워졌고, 바깥의 매미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p.205)
생각해보니 달라진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살고 있는 세계인 것도 같았다. 초가집이 있고 마을이 있고 꽃은 여전히 피고 지건만 그 모두가 실은 예전 그대로가 아니라 새 것이었다. (p.213)
그렇지만 다시 싸우게 될까봐 나는 좀 … 무섭습디다. (p.227)
여전히 할 말이 없었다.
“네 세상에 버거운 게로구나”
그 말에 눈시울이 후끈해졌다. (p.241)
세상사 어떤 일에도 참여하지 못하건만, 세상 돌아가는 일만은 그녀의 일에 벌써 사사건건 간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p.243)
변화는 몇 자의 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오. (p.250)
우리가 가야하는 이유는 하늘이 저리도 푸르기 때문이라오. (p.254)
적은 분명하되 시작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다. (…) 지더라도 싸워야 한다는 그들의 명이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p.256)
참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여 말과 힘으로도 어쩔 수 없을 때 조선인들이 하는 말이 있소. 무엇인지 아시오?
천벌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반드시 천벌을 받는다! (p.276)
 대체 그 사람들을 누가 알아준답니까요?
–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p.290)
 북받쳐서 그럽니다. 동무들과 나서서 싸운 일이 벅차고 뜨거워져서 그럽니다. 이 겨울에 나는 장군과 함께 싸웠습니다. (p.302)
 전투의 패배란 어느 한쪽의 피해에 의해서도 결정되지만 실상은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정해지는 것 같았다. (…) 그것을 회복하지 못하는 순간 전쟁의 패배는 찾아오는 것이었다. (p.303)
 이 길이 가장 옳았다고 확신하십니까? (…)
– 그대가 목숨걸고 나선 길이오. 의심하지 마오.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말에 갑례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졌다. 그녀에게는 기다릴 사람이 없어져버린 탓이었다. (p.326) 
두어라! 백성이 주는 술이다. (p.338)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새로운 세상에 나서게 될 날을 그녀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어떤 세상이든 헤쳐나갈 자신이 있었고, 도치를 번듯하게 키워 세상에 내놓을 자신도 있었다. (p.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