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살게 된 각 개인은 그에 상응하는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바로 고독이다.

 

김정운은 글을 재미있게 쓴다. <남자의 물건>과 <에디톨로지>도 그랬다. 모두 만화책 보듯이 낄낄거리며 읽히는 책이다. 김정운은 ‘어려운 말을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 진짜 지식인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은 그에게 더욱 힘을 실어준다. 정말 쉽게 잘 읽히기 때문이다. 한글 책인데 도무지 외국어 읽는 듯한 전문서적은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

김정운의 글은 진입장벽이 낮아서 오히려 뒤로 가면서 아쉬워진다. 계속 가볍게 끝내려는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분명 그의 지식의 양이나 가끔 튀어나오는 인사이트가 있는 문장을 보면 무시할 수 없는데, 쉬이 가벼워 보인다. 김정운의 책이 이번이 처음이었다면 아쉬움은 덜 했을 것이다.기대감을 가지고 다음 책을 기다리게 되니, 자꾸 겉돌기만 하는 내용들이 아쉽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보다 <에디톨로지>에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이번 책은 자기계발서의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베스트셀러 1위가 될 수 있었다..라는 나만의 생각 투척.

 

알게 모르게 외로움을 느끼는 중년 남성들을 저격하며 쓴 글이라고 생각했다. 김정운은 ‘우리나라 중년 남성’에게 아주 관심이 많다.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사상의 대세는 중년 남성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정운의 퍼소나는 ‘중년 남성’이고 그들의 특징은 크게 ‘아이덴티티의 부재’다. 마이웨이를 가지 못하고 마이스타일을 갖지 못하는 그들에게서 닥쳐올 고령화의 문제점을 찾고, 그들의 고집스러운 사유에서 문화충돌의 대립점을 찾는다. 그리고 말한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고. 고독을 견디지 못하면 100세 인생을 대할 때 실패할 수 있다고.

‘고독’은 우리 세대에서는 이미 익숙한 단어다. 혼자서 즐기는 것이 부자연스럽지 않은 세대에게는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니다. SNS중독자가 많은 세대지만 결혼을 하지 않겠다!라고 외치기도 하는 세대다. 하지만 우리의 아버지, 중년 남성에게 ‘고독’은 처절한 고통이다. 나의 명함이 사라지면 나의 정체성도 함께 흔들리는 마음의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김정운은 고독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대안이라고 말한다.

다시 한번, 나는 <에디톨로지가> 더 좋았다. 에디톨로지 내용이 반복되는 감이 있다. 앞 부분은 에세이처럼 새롭게 읽었는데 뒷 부분은 <에디톨로지> 내용이 보여서 스르륵 넘겼다. 저자 후기에서 김정운은 독자와의 소통을 위한 ‘빈틈’과 여지를 많이 남겼다고 했지만 나는 과한 부분도 꽤 있다고 생각한다.

“순전히 내 생각이다”라는 말보다 인과관계 설명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 ‘일방적인 계몽 시대는 명이 다했다’라고 그가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의 인사이트가 여전히 궁금한 사람(나)도 있다. 그의 책 3권을 읽었지만 그의 명확한 인사이트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책을 또 읽어 볼 거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명확히 알고 싶기도 하거니와 그의 솔직한 글이 마음에 든다. 소심한 사람이 소심하게 펼치는 자기 주장은 참 답답하지만 유머가 장착되니 화내지 않고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 유머가 부러워서 자꾸 찾게 되나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살게 된 각 개인은 그에 상응하는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바로 고독이다. (p.24)
 여자의 ‘맥락적 사고’는 시간이 흐를수록 확장된다. (…) 한국 남자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회적 역할을 덜어내고 차분히 앉아 생각할 수 있는 배후 공간이다. (p. 36-37)
 ‘노력-성공의 인과론’도 마르크스주의 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다. (p.58)
그러나 자신의 운명에는 진실로 겸허해야 한다.
고령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연금’이 아니다. 은퇴한 이들의 ‘아이덴티티’다. 
 오늘날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의 대립만은 아니다. (p.67)
 역사란(…) 문화적 기억 (p.91)
 존재란 항상 자신이 속한 맥락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p.101)
 사람은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려고 생각한다. (p.108)
 행복은 아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이다. 난무하는 자기계발서의 추상적 언어로 아무리 자기 최면을 걸어도, 자신의 구체적 생활 언어로 번역할 수 없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p.114)
 막연하고 추상적인 ‘공간’과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을 통해 의미가 부여되는 ‘장소’를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p.121)
 집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에 머무르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장소 상실placelessness’로 정의한다. (p.121)
 시공간적 좌표를 갖는 삶의 구체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p.122)
 도구가 행위를 규정한다는 말이다. 도구는 의식을 규정하기도 한다. (p.123)
 다가올 내일의 작은 변화에 대한 기대로 오늘의 삶에 잔잔한 리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p.135)
 자신의 두 눈으로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 존재의 기반이다. (p.147)
 좋은 그림의 기준은 철저히 주관적이다. 그러나 주관적 느낌에 확신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그림 감상은 은근한 공포다. (p.149)
 나와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존중과 호기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p.157)
 ‘금지할수록 욕망한다’는 심리적 반발이론 (p.165)
 금지를 허하는 순간 주체적인 삶은 바로 끝나기 때문이다. (p.166)
 자유란 (…) 주어진 콘텍스트에서 주체적 선택의 범위가 넓어야 행복하다. (p.185) 
일방적 계몽시대는 이제 명이 다했다는 것이다. (p.242)
‘재현’에서 ‘표현’을 가능케 한 사회적 조건이 있었다. (…) 여가 시간이 없었다면 인상파는 가능하지 않았다. (p.242)
인식의 주체가 어떻게 동시에 인식의 객체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제기 (p.274)
‘생각’이란 이렇게 각기 다른 분열적 자아들 간의 ‘대화’로 설명할 수 있다.
의미는 불을 피울 때 만들어진다. (p.282)
인간 사유의 본질은 ‘날아다니기’다. (…) 클릭하면 바로 A4용지 밖으로 날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논리적, 비선형적이다. (p.294)
도무지 교환할 수 없는 사유방식의 차이, 존재 양식의 갈등은 거의 문명충돌에 가깝다. (p.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