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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 저항하고 대립하라. 자유를 위해.

by Summer_bom 2016. 9. 13.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올바르게 사용해 아름답게 완성하는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자신이다. 

 

출판되자마자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나의 소양으로는 부족하리라 생각해 각오하고 첫 장을 읽기 시작. 예상대로 한국어를 읽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익숙해지고 나니, 조금씩 그가 말하는 내용들이 들어왔다.

옮긴이의 말처럼 영어로 된 원본도 읽기 어렵다고 하는 이 책은, 그래도 딱딱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친절한 편이다. 그가 주창하는 자유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리고 그 자유는 어때야만하는지에 대해 꼼꼼히 설명해준다.‘자유’만으로 빽빽하게 밀도있게 말하는 책은 처음이라 중반부에 지치기도 하고, 다시 새로운 눈으로 읽기도 함을 반복했다.

 

첫 부분에는 아무래도 좀 관념론적인 내용이 많다.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자유’라는 것을 일상으로 끌어오기 위해서 앞부분을 할애한다. 그래서 사실 앞부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ㅋㅋㅋ

그래도 꾸역꾸역 읽다가보니 어느새 그가 말하는 ‘자유’에 익숙해졌는지 잘 읽히는 시점이 온다. 그는 본인 의견의 반대자를 가상으로 만들어서라도 자신의 논리로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래서 읽다가보면 반대파의 인물과 토론한 내용을 정리해서 썼나 싶기도 하다. 이것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유’다. 얼토당토 않더라도 소수의 반대자는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며, 그리고 주장자는 그에 대해 반박하면서 신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것이다. 자유는 그래서 ‘생명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선 토론문화가 없다. 없다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님을 모두가 안다. 게다가 획일화에 마음이 놓이는 정서가 내제되어 있어서 밀이 말하는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하리라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미 각 개인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펭귄클래식 인문학특별판으로 나온 시리즈로 책이 예뻐서 질러버렸다… 예쁜 것들이 주변에 있으면 나까지 기분좋아지지 않는가? 나는 그래.. 그래서 소장가치는 이미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장에 꽂혀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으니까-

그렇지만 그 예쁜 책이 ‘절대적인 고전’이라면 소장가치는 더욱 올라간다. 내 책장에 <자유론>이 있다는 것은 내가 언제든지 펼쳐볼 수 있고, 내 생각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용을 하기 위해, 내 생각에 주석을 달기 위해 자주 펼쳐볼 것 같다. 분명한건, 한번 더 읽어야겠다는 것이다…(후)

 

5장 ‘적용’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신기했다. 우리나라 갈등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21세기의 한국을 보았을리는 없지만, 그래도 ‘자유’가 어떤 미래를 가질지는 고찰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한국사 국정화교과서’를 예견한 듯,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국가에의해 수립되고 통제되는 교육이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많은 경쟁적인 실험들 가운데 하나로서만 존재해야 하며, 다른 실험들이 일정한 수준의 우수성에 도달하도록 실례와 자극을 줄 목적으로 경영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 국가는 충분한 경쟁력을 위해 국정화 교과서를 집필하는 것인가? 왜 한국사 교과서가 젊은 세대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충분한 토론과 근거있는 의견을 피력하지도 않은 채 몰아붙이는 것은 어떤 것을 수호하기 위해서인가? <자유론>을 읽으면서 많이 답답했다. 이 모습을 보고 밀은 어떤 말을 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원칙이란, 인간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어느 한 사람의 자유에 정당하게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자기보호를 위한 경우밖에 없다는 것이다. (p.81)
 한 사람의 행동 가운데 그가 사회에 책임을 지는 유일한 부분은 타인들과 관련된 부분이다. (p.82)
 그 자신에 관해서는, 그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대해서는 그 개인이 주관자이다.(p.82)
인류는 각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좋아보이는 대로 살게 되면, 강요에 의해 타인들에게 좋아보이는 대로 살게 할 때보다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p.86)
그 의견이 틀리다면, 인류는 거의 이에 못지 않게 큰 혜택을, 곧 오류와의 충돌에 의해 창조되는, 진리에 대한 더 분명한 지각과 더 선명한 인상을 잃는 셈이다. (p.92)
 즉 인간의 오류는 교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p.97)
우리가 최대로 보증할 수 있는 믿음들은, 세계로 하여금 이 믿음들이 무근거함을 증명해보라고 끊임없이 요청하는 것 이외에는 기댈 수 잇는 보증 수단이 없다. (p.98)
그런데 대답되어야 할 것이 애초에 거론되지 못한다면, 그 모든 반대가 어떻게 대답될 수 있겠는가? (p.123)
토론이 부재할 때는 의견의 근거들만 잊히는 것이 아니라 의견의 의미 자체도 너무 자주 잊힌다. (p.124)
 신조가 아직 존재를 위해 싸우고 있을 동안에는 이와 같은 어려움을 불평하는 소리가 전혀 없다. (p.126)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절실히 느끼기 전에는 그 완전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는 진리가 많다는 것이다. (p.130)
 인간의 정신에서는 항상 일면성이 규칙이었고 다면성은 예외였던 것이다. (p.135)
 삶의 중요한 실제적 관심사에서 진리는 워낙 대립하는 것들을 화해시키고 결합시키는 문제여서, (…) 따라서 조정은 적대시하는 기치 아래 싸우는 투사들 사이의 거친 투쟁과정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p.137)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올바르게 사용해 아름답게 완성하는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자신이다. (p.154)
 하지만 욕망과 충동은 믿음과 절제만큼이나 온전한 인간의 일부이다. (…) 사람들이 악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들의 욕망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그들의 양심이 약하기 때문이다. (p.155)
 감히 별나지려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이 시대의 주된 위험이다. (p.167)
 상식과 경험이 꽤 있다면, 그 자신의 방식으로 자기 실존을 설계하는 것이 최상이다. 이는 그것이 그 자체로 최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 자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p.167)
 언제 멈추는가? 그것은 그 민족이 더 이상 개성을 소유하지 않았을 때이다. (p.172)
 그러나 그 자신이 최후의 재판관이다. (p.181)
 자유의 원칙은, 그가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할 수 없다.(p.220)
 그만큼 인류의 대부분은 자유보다는 권력을 훨씬 더 숭상한다. (p.224)
 일반적인 국가 교육은 사람들을 서로 똒같게 빚어내려는 단순한 장치에 불과하다. (p.226)
 정부가 개인과 단체의 활동과 능력을 불러내는 대신 그들의 활동을 자신의 활동으로 대체하려 할 때, 해악은 시작된다. (p.238)
국가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가치다.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