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토옙스키의 초기작이다. 알고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풋내가 났다. <죄와 벌>이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과 같은 고독과 분노같은 음울한 감정보단 희망과 미래를 꿈꾸는 이야기가 많다. 헤르만 헤세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은 서한 형식의 소설이다. <젊은 …>은 일방적 편지이지만 <가난한 …>은 두 사람이 주고 받은 서신으로 이루어져 더 입체적이다.

주인공은 제부쉬낀과 바르바라이다. 균형은 제부쉬낀쪽으로 더 치우처졌다. 그의 편지가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또 제부쉬낀의 성격이 더 다양하기 때문이다. 제부쉬낀의 편지는 감정적이고 장황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쓴다. 석영중 교수는 이를 ‘문학적 빈곤’이라고 칭한다. 제부쉬낀과 바르바라간의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은 둘의 나이차이나 물리적 빈곤때문이 아니라, 서신만으로도 드러나는 그들의 문학적 빈곤의 차이다. 한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읽는 책, 그가 쓰는 글이라는 도스토옙스키의 미학 공식이 드러난다. 이미 둘의 존재는 달라있고 함께 할 수 없는 결말이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문학적 가난을 물리고서라도 물리적 가난의 요소는 소설 전체를 지배한다. 자유사상이 위험하다고 인식될 시대에 태어난 가난한 사람들의 가장 큰 덕목은 ‘인정’이다. 내가 이런 신세인 것을 인정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감사하는 것. 그래서 니체는 기독교를 노예의 사상이라고까지 했던 것일까..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적으로 움츠러 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제부쉬낀은 자신이 날 때부터 윗 사람에게 복종하는 존재란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자신에게 조금의 온정이라도 베푸는 윗 사람을 만나면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본 것 같은.. 자유의지가 없는 사람들.

인상적인 것은 제부쉬낀이 그렇게 외치던 ‘체면’과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그에게 자존심이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것이다. 혹여라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 자신의 가난이 들킬까봐, 그는 항상 불안해 한다.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체면치레는 하고 싶은 그의 작은 욕망. 그는 정말 인간적이다. 시대 사상에 복종해 가난하게 살아가지만, 인간이 가져야 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아둥바둥하는 모습이 그렇다. 귀족과 같은 옷을 입는 것이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옆 방 사람이 마시는 차 정도는 마시는 것, 가난때문에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것이 그가 바라는 전부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순 거짓말이다. 인간에게 자유가 허락된지 얼마 되지 않은 역사동안 가난은 한 번도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다. 그런 어줍잖은 말로 마지막 자존심까지 앗아가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