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짧은 토막으로 이루어진 글이 모인 인생의 서사극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00쪽에 이르는 장편이지만 긴박하게 이루어져 멈출 수 없는 호흡이 아니라, 중간중간 틈을 만들어 숨쉴 호흡을 만들어 주는 책이다.
그래서 오히려 2번 펼쳐서 다 읽을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읽는 내내 힘들다는 생각이 안들었으니까.

대게 소설에는 주인공이라 불리는 2명의 남녀가 있다. 이 책에선 테레자와 토마시다.
보통 생성과 소멸로 흐름이 이어지기 마련인데, 난 둘의 만남이 계속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또 새로운 만남을 야기하며 끝을 맺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단순히 남녀의 사랑, 만남, 감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질투, 증오, 분노까지 품은 희극이자 비극이 아닐까.

재밌었던 건, 나오는 등장인물의 ‘현재’에 집중하면서도 이 순간이 있기 위해 어떤 우연들이 있었는 지 조목조목 말해준다.
소설의 완성도는 그 짜임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짜임새가 탄탄하고, 또 흥미롭게 다가와서 독자가 주인공에게 깊이 몰입하기에 부담없었던 것 같다.

특이하게 중간중간 작가가 끼어들면서 자신의 주인공들에 대해 설명을 한다.
그것이 불편하고 뜬금없기 보단, 환기가 된다. 감정적인 미사여구가 많고 추임새도 많아서 감정이 고조될 때 쯤,
한번씩 작가가 튀어나와 이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가진 또 하나의 아바타라는 환기를 준다. 중간에 한 번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틈이 된다.

작가의 발상이 흥미롭다. 작가에게 역사, 인생은 가벼운 것이고, 동정심은 가장 무거운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반복’을 가장 무겁다고 바라보는 건 아닐까.
테레자와 토마시의 우연의 반복, 그리고 토마시가 테레자에게 느끼는 끊임없는 동정심, 계속해서 토마시에게 주어졌던 ‘그래야만 한다’의 의무감.
이런 것들이 가장 무겁다고 말한다.

반대로 내일이면 사라질 역사, 초안과 완결이 없는 우리의 드라마같은 것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고, 그가 말한다.
그래서 니체의 영혼회귀 사상은 그렇게도 무거운 것이다.
난 니체의 영혼회귀에 많은 영향을 받아 매 순간에 너무 무거운 짐을 더하는 것은 아닌 지, 좀 더 휘발성을 가진 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이란 그 순간엔 그렇게 무거운 짐처럼 보여도, 또 다가올 책임에 짓눌리는 것처럼 느껴도,
우리의 인생을 우주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깟 거’라고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백 세도 다 못사는 주제에 천년의 근심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했던가

-김삿갓

언젠가 이 문구를 보고 마음이 붕 뜨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예전에 만난 한 지인은 천체물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취미라 했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가 천체로 눈을 돌리면 자신은 하나의 먼지구나, 라는 생각에 안도가 된다고.

우리는 자주 너무 좁고, 작은 시선으로 세상을 무겁게 바라보게 된다.
무거운 것은 흘러가는 시간, 오늘이 아니라 그 속에 꽁꽁 뭉쳐서 담아놓은 우리의 고민일 뿐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혹자는 말하겠지. 우주적으로 바라보아 나의 고민을 가볍게 한 들, 그게 무슨 해결이 되겠느냐고.
‘해결’. 살아가는 데 해결만이 하나의 목적이라면 난 점점 무거워지다 못해 땅으로 추락하는 건 아닐까, 싶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어쩔 때는 ‘시선’에 있을 수 있겠다는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밑줄노트

영혼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 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p.12)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p.17)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p.21)

동정심보다 무거운 것은 없다. 우리 자신의 고통조차도, 상상력으로 증폭되고 수천 번 메아리치면서 깊어진,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 타인을 대신해 느끼는 고통만큼 무겁지는 않다.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p.60)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p.93)

그녀는 참이 어려운 추락욕구를 느꼈다. 그녀는 지속적인 현기증 속에서 살았다.

그녀는 다시 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한히 슬퍼졌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이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색깔을 거느리며 사라지는 인생에 대한 작별. (p.282)

“난 몰랐어! 그렇다고 믿었어.” 라는 바로 그 말속에 돌이킬 수 없는 그의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닐까? (p.288)

내면의 명령은 더욱 강렬하고 그래서 더욱 강하게 반항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p.317)

그때까지 자신의 소명이라 믿었던 모든 것을 털어 버렸을 때 삶에서 무엇이 남는 지 보고싶은 욕망. (p.317)

의무? 아들은 지금 그에게 의무가 무엇인지를 환기해주려고 한다.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이었다! (p.352)

그가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p.353)

역사도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하나뿐이다. (…) 그 역시 두번째 수정기회 없이 어느 날 완료될 것이다. (p.359)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p.358)

현실이란 꿈을 뛰어넘는 것, 꿈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란 확신을 갖기 위해 그는 여행을 했던 것이다. (p.448)

키치란 존재와 망강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p.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