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는 어렵게 글을 쓰는 편이라고 한다. 난 사실 <변신>을 읽으면서 그런 점은 잘 느끼지 못했다. 굳이 해석을 하면서 읽으려고 하지 않는 습성이 있어서 쉽게, 쉽게 단락마다 느낌에 충실하여 읽어 나갔다.

문학적인 부분은 ‘플라톤아카데미’의 강의를 보면서 의미파악을 했다.

카프카가 유대인이어서 느껴야만 했던, 받아야만 했던 시선에 대한 고민을 좀 듣고 나니, 그가 ‘벌레’라는 비유를 본인에게 빗대어서 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난 벌레 혐오증, 공포증이 있다. 일반 사람들보다 좀 극도로 두려워하는 편에 속한다. 그런 내가 상세하게 벌레의 모습과 행동을 묘사한 글을 읽으며 상상하기 괴롭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난 그레고리 잠자가 변한 ‘벌레’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생각됐다. 주인공 잠자가 벌레로 변했지만 이질감을 느끼거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은 것에 대해 자연히 몰입했기도 했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팠다’라는 사실은 대단히 인간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의 ‘인간관’은 자연스러운 동물의 습성을 더 존중하는 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배를 고파하고 멋대로 기어다니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직장인’의 모습을 잊고 본인 몸에 충실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차라리 더 인간적이라는 생각이다. 남을 위해 희생하고, 충성하고, 무거운 책임감을 지는 모습보다는 말이다.

일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난 타인이 기대하는 ‘인간다운 면’을 고민하고 만들어왔다. 기대되는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으면 일종의 벌레로 취급되고마는 현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레고리 잠자처럼.

그러나 우리는 내가 가진 짐승의 습성을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벌레같다고 취급되는 나의 게으름이, 무관심이, 폭력성이 어쩌면 내가 가장 자연스러운 한 모습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주장하는 이유와는 다르게, 나도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가장 솔직해지는 나만의 공간, 화장지운 쌩얼보다 더한 나의 모습을 온전히 노출할 수 있는 공간, 가장 자유로운 자기만의 방.

 


그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오로지 자기뿐임을 잘 의식하고 있었다. (p.28)

이미 첫 날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와 누이의 재산 상태와 앞날의 전망을 설명했다. (p.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