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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한강 : 피묻은 파편조각에 담긴 이야기.

by Summer_bom 2016. 9. 13.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한 개인이 가진 신념은 곧 그를 둘러싼 사회라는 걸 가감없이 보여준 책이었다. <소년이 온다>는 잘 알려진대로 '518민주항쟁'을 배경으로 한 6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인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은 것은 사회배경이었다. 마주본 뜨거운 눈빛으로 '나라란게 무엇일까'라며 주고받는 배경에는 군인 대통령이 있었다.

특별히 그 인물의 행패에 분노가 일기도 했다. 어떤 자격으로 내 생각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총으로 쏠 수가 있는가. 그러나 그런 감정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는 남겨진 각 개인이라는 걸. 그 시절, 자신의 신념을 믿었던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

한 때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신념때문이라며 그들은 지금은 후회하고 있을까, 철없던 행동이었다며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들은, 그들의 소년시절을 없던 시절로 만들고 싶진 않을까.

'고맙습니다'라며 박수치고 5.18 기념일에 묵념 잠깐 하는 걸로 퉁쳐버릴 수 있는 이야기였다면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섣불리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남았다."라는 작가의 에필로그처럼, 나는 애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고, 그 사실을 보며 일렁이는 내 감정으로 알 수 있다. 그건 옳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라는 생존자들의 증언처럼 정치 이념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책을 읽고 나니 역사는 개인의 파편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내 삶에만 집중하다보니 직접 관련 없는 다른 사건들은 거시적으로보는 게 편했다. 일일이 몰입하게 되면 감정 소모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나간 역사를 감정소모하며 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고민이 생겼다.

역사,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약속했고, 믿고 있을 뿐이다. 역사도, 시간도 형체없는 관념이기에 '지나가버린 역사'라는 것도 없다. 결국 내 삶은 파편처럼 여기저기 뿌려진 채로 존재하고 있다. 그 파편은 가족과 친구, 동료나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닿아서 사라질 수도, 기억될 수도 있다.

특별히 군인 대통령에 목숨걸고 대항한 그들의 피묻은 파편은 시간과 상관없이 떠돌다가, 내게 스며들어 생각하게 하고 글을 남기게 했다. 이런 식으로 많이 남겨진 파편들이 '역사'라는 거대한 단어로 불릴 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역사는 감정소모를 필연으로 한다는 것.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에필로그에 실린 희생자의 가족의 말이다. 오래, 많이 기억된 파편 조각이 누군가의 의도로 다르게 남겨진다면 그 파편을 나눠가진 사람들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픽션이 역사를 살아나게 한다는 말은, 의도없이 감정에 충실할 수록 조각조각 스며든 숨결이 숨쉰다는 뜻이라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난 숨길이 깃든 오만가지 파편 덩어리. 그 숨결에 '나'라는 숨결이 더하여져 누군가에게 또 다른 파편 조각으로 스며들겠지. 그때 그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킬까, 라는 막연한 상상은 지금 당장의 내 생각과 행동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몸이 죽으면 혼은 어디로 갈까, 문득 너를 생각한다. 얼마나 오래 자기 몸 곁에 머물러 있을까. (p.15)

그렇게 하면 나라란 게 무엇인지 이해해낼 수 있을 것처럼. (p. 22)

너무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 피를 그냥 덮으란 말입니까. (p. 27)

꿈보다 무서운 생시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p.42)

캄캄한 이 덤불숲에서 내가 붙들어야 할 기억이 바로 그거였어. (p. 67)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p. 115)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p. 124)

한시간여의 그 절망적인 침묵이, 그곳에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킬 수 있었던 마지막 품위였습니다. (p. 126)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p. 137)

그게 우릴 지켜줄 줄 알았지. (...) 하지만 우린 그걸 쏘지도 못했어. (p. 152)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p. 162)

견디는 것은 당신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p. 184)

악몽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기억들이 조용히 당신의 머리맡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p. 193)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 (p. 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