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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나를 통과한 사랑. 한 때 나를 살게 한 사람.

by Summer_bom 2024. 1. 22.

그 시절, 자주 마시던 포트 와인



뭐가 그리도 비장했을까.
나를 피나게 하는 선인장이어도 나는 당신을 또 안을래,라는 일기를 썼던 때였다. 사랑을 하는데 실제로 온몸이 아팠었다.
그때여서 할 수 있던 마음이었다. 내 가족이 무너지며 태풍에 내가 다 휩쓸려서 폐허가 되었던 때.
불쑥 나타나, ‘너와 살고 싶어’라던 당신의 다정한 말은 나에게 단 하나 믿을 사람, 믿고 싶은 낙원이었다. 나를 다 내맡기고 싶었다. 너는 든든했고, 참 다정했으며, 심지어 폐허 된 나를 보호해주고 싶다는 말을 했다.
탐이 났다. 한번도 그려보지 않았던 같이 사는 삶을 먼저 꿈을 꿔주고, 우리 거기서 같이 행복하자며 내민 손을 겁도 없이 덥석 잡았다. 다만 거긴 ‘너’만 있던 낙원이었다. 나는 초대받았지만 그 낙원에 가기 위해선 내 일부를 도려내야만 했다.
 
사랑은 ‘한다’라는 동사보다 아무래도 ‘당한다’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사랑의 속성에는 분명 ‘어쩔 수 없음’이 있다.
나는 할 수있는게 그것밖에 없어서 기꺼이 나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끊기지 않는 연락, 조심하는 단아한 말투, 순응하는 자세. 당신의 기준에 벗어날 때면 크게 혼이 나서 주눅이 들었다. 나는 왜 당신의 낙원에 들어갈 수가 없을까, 자책하는 밤으로 10개월을 보냈다.
나는 사랑할 준비가 안되었어, 너무 이기적이야, 그래서 사랑받는 게 힘든 거야.
싸우고 난 다음 날이면 마음 졸이며 이런 마음을 담아 반성문을 보냈었다. 네가 용서를 해주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다 여느 때처럼 너덜너덜해진 어느 날,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사랑이었을까, 욕심이었을까, 묻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넘어져도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며 다시 일어섰고 그 힘은 또렷이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었다. 포근하고 편안하지 않고 투쟁하는 사랑도 있음을 이젠 안다. 네가 있는 곳, 그리로 가고 싶어서 부단히도 싸우던 마음도, 나를 분해해서 당신이 지키고 싶던 모습과 꿈꾸던 미래에 스며들고 싶었던 애잔한 진심도.
 
박정훈 작가가 쓴 <헤어질 결심> 리뷰의 한 문장에 내 시절을 끼워 넣어 본다.
“살아가면서 자주 잊기도 하지만, 사랑은 아무래도 고약하다. 뒤흔들고 불안하게 요동치지만, 인생을 걸어보게 만든다. 무얼 믿고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닌, 사랑에 빠진 자신의 마음을 믿고서 “.
나는 내 마음을 확신해서, 그리도 비장했다.
비장한 진심으로도 지는 싸움이 사랑임을, 그리고 그 비장함도 녹슬 수 있다는 걸, 이젠 안다. 그리고, 안다고 해도 이기지 못할 거라는 것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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