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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분열되고 섞이는

by readingcats 2024. 3. 4.
스토크 꽃. 비단향 꽃무라고도 한다. 스토크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아침에 깨서 곧바로 글을 쓴다. 올겨울의 마지막 꽃샘추위가 찾아왔던 지난밤, 난 또 잠에 들지 못할까 무서웠었다. 새벽에 한 번 카레가 깨웠지만 다행히 거의 깨지 않고 푹 잤다. 그 전날에 거의 자지 못해 쌓인 잠이었다.

눈보다 먼저 의식이 퍼뜩 떠졌다. 생각이 몰려왔다. 깨서 생각이 몰려온 건지, 생각이 잠을 깨운 건지는 모르겠다. 그저께 저녁 정성스러웠던 네 거짓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장정 세 달 동안 눈물을 뚝뚝 쏟으며 되뇌었던 대단했던 다짐들이 연이어 생각났다. 가장 최근 눈물의 다짐은 3주 전이었었지. 하 씨, 오늘 새벽도 이렇게 잠을 못 자려나 싶어서 심호흡하며 명상을 시도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멈추지 않는 기억에 집어삼켜질 즈음에 이럴 바에 그냥 일어나지, 싶어 눈을 떴고 핸드폰을 켜 시간을 보니 6시 59분이었다. 다행히 잘 만큼 자고 일어날 시간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래도 잠을 못 이루진 않았구나 싶어 안도했다.

내 뒤척임을 단박에 알아채고 냐아, 하며 다가오는 카레에게 팔을 내어주고 15분 함께 가만히 누워있었다. 내 왼팔에 머리를 콕 박고 쌔근쌔근 평안한 숨을 내쉬는 내 아기 고양이. 더 가까이 붙으라고 내 팔을 끌어당긴다. 그러면 나는 행복해서 웃는다. 머릿속에서 윙윙대던 너의 소란이 잠시 꺼진다. 참 신기하지. 고통과 행복이 동시간에 공존할 수 있다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재회한 후 함께 보냈던 너와의 시간도 그랬었던 것 같다. 내 몸에 찰싹 붙어있는 불안과 두려움, 그것이 겹겹이 덧대어진 갑옷을 입고서 너를 다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으로 네 머리를 쓰다듬던 따뜻한 손길이 공존했다. 불안의 시한폭탄을 품고서도 사람은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고 싶은 욕심에 다정해질 수도 있다.

아무래도 더 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몸을 일으켰다. 먼저 나간 두 고양이가 거실에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저 집사가 드디어 일어나려나 보다 하고 그릉그릉 백분 대기상태이다. 그 모습을 보고 또 코로 흐흐, 하고 웃으며 걸어 나갔다.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고양이들.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가고, 천장을 향해 기지개를 켜는 내 다리에 자기 꼬리를 자꾸 비빈다. 여러 높낮이가 섞인 칭얼대는 울음소리를 낸다. 언제부터 너희가 이렇게 말이 많아졌을까. 내가 너희에게 조잘조잘 말을 참 많이 했던 것이 떠올라 우린 닮았네, 하며 또 흐흐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저께 헤어지던 밤에도 쪼르르 너희들에게 달려가 일렀었다. 소리내어 울고 있는 내 곁에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꾸욱 감은 채로 가만히 있던 너희들. 그 작은 몸통을 붙잡고선, 그러니까, 자주와서 너 예뻐해 주던 그 아저씨 있잖아, 이제 안 올 거야, 오늘 저녁에 정성스럽고 예쁜 말을 해서 나를 안심시키더라고? 근데 그게 거짓말이었어. 30분 뒤에 강남으로 날아가 노래 부르는 곳에서 여자들 만나러 갔더라고. 바로 들킬 거짓말인데, 추궁하니 허둥대는 것도 참 우습더라고, 같은 이유로 헤어졌었는데 다시 만난 지 두 달만에 또 그랬다는다는 거지. 얘들아, 나는 꼭 이렇게 똥을 찍어 먹어 보면서 배우는 사람이야. 조잘거리다가 다시 화가 치밀었고, 큰 소리로 울었다. 맨들맨들하고 예쁜 연분홍의 귀에 들려줄 만한 얘기는 아니었는데.

아침을 시작하는 빗질에 카레가 배를 드러내며 눈을 가냘프게 뜬다. 그걸 지그시 바라보다 웃음을 머금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눈물이 터졌다. 사랑해, 그 말을 주고받았던 너와 내가 떠올랐고 같은 마음이 아니었었구나 하는 생각에 카레야, 엄마 외로워, 라는 말이 그 다음 터져 나왔다. 지금 내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행복하고 사랑하는 기분과 네가 준 상처와 고통을 동시에 느낄 수 있듯, 우리가 수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도 각자 다른 시간을 보내고, 다른 감정을 지녔을 수 있다. 함께 있었지만 같지는 못했고, 그래서 같이 있던 모든 시간들이 분열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내 몸엔 불안과 두려움만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줄 알았는데, 네 환한 웃음과 나를 아끼던 마음, 진심이었던 노력, 그것도 피부에 딱 붙어 있었다. 이것도 함께 있었지, 그래서 떼어내려니 이렇게 아픈거지. 네가 주던 넘치던 마음과 노력도 진실이었고, 쾌락을 즐기고 싶은 네 욕구도 진실인 것처럼. 다만 나는 너의 다른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 기준에 마음에 드는 것, 그것만 누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 이별은 성격 차이, 가치관 차이다. 이렇게 조망하고 나니, 덜 외로워졌다.

처음 시작했던 아침으로부터 3일이 지난 오늘 아침에 다시 글을 쓴다. 아침으로 프랑스산 바게트를 노릇하게 데워서 피넛 버터에 발라 먹었다.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고소한 빵과 피넛 퍼터, 따뜻한 커피, 또 책과 고양이, 그래도 하나 더 필요해서 향까지 피운 후에야 울지 않고 앉았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너의 자리를 메우는 데 내 온 마음을 쓸 것이다. 널 사랑하고 또 용서하기 위해 썼던 노력의 몇 배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떨리는 몸을 겨우 앉히고서 이 글을 어떻게든 쓴다. 나는 이런걸 왜 기어코 쓰나. 내겐 이게 가장 쉬워서, 사랑했어서, 미워했고 다시 이해하기 위해서, 울지 않기 위해서, 또는 울기 위해서, 거품이 되지 않으려, 또 침잠하지 않기 위해서, 이건 내가 마음 썼던 모든 것의 증명이니까. 온 마음으로 써놓은 이 글이 한동안 날 돌봐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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