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담

랜딩

by Summer_bom 2023. 10. 9.


1.
열흘간 다녀온 반짝이던 여름 나라에서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것 같다.
여름은 가득 차고, 요란하고, 일렁인다.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기까지 일주일이나 걸렸다. 일렁이는 가슴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To do 리스트를 쳐내려 가는 직사각형의 일상이 못내 미웠었다. 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으로 3일을 겨우 버티고 또다시 3일간 연휴를 맞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간단히 스트레칭하고,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창문을 다 여니, 차가운 온도와 후두둑 가을 빗소리가 들린다. 이제야 가을이란 계절을 받아들인다.


2.
처음 걸려본 장염이 다 나은 오늘, 가장 좋아하는 비건 음식점에서 랩을 포장해 와서 먹었다.
건강 때문에 끊었던 커피도 반년만에 직접 내려서 마셨다. 구석에 넣어두었던 포트, 전자저울, 그라인더를 꼼꼼히 씻고 어제 얼려둔 얼음을 꺼내 아이스커피를 내렸다.
역시 내 입맛에 맞게 조절해 가며 직접 내려 마시니 깔끔하고 만족감이 높다.
점심엔 포장길에 사 온 소금빵을 우걱우걱 먹었다. 소금빵을 들고 있으니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절로 콧노래가 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들에게 나 소금빵 먹는다~ 자랑하고는 에어프라이어에 돌리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진한 버터 향과 커피 내릴 물이 끓는 소리, 고요한 마지막 휴일의 이 시간.


3.
어젯밤 다 보지 못한 <TAR 타르>를 마저 봤다. 케이트 블란쳇은 역시 스크린을 가득 채울 때가 가장 좋다. <블루 재스민> 때처럼 끝내 그녀를 구원해주지 않고 영화는 끝이 난다. 주어진 불행에 스스럼없이 괴로워하며, 참담함을 온몸으로 수용해 나간다. 그렇게 용기 있지도, 희망차지도 않지만 크게 비겁하지는 않게. 어쩌겠어, 하는 착잡함을 너무 잘 표현하는 것 같다.

 


4.
지금은 오후 세시. 세상이 고요하다. 오늘이 지나면 크리스마스 때까지 휴일이 없다는 걸 모두가 잘 알아서 온전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다. 다들 같은 마음이구나 싶은 게 참 신기하다. 산다는 건 다 비슷하고 그 비슷함 속에 있는 것이 안심이 된다.
어느 때에는 특별하고 싶다는 기묘한 욕심이 들지만, 이 욕심 또한 평범한 것이다. 평범한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할 테다. 대부분 평범하지만 가끔 특별하고 싶은 생각, 그러면서 내심 특별한 삶을 살면 어떨까 하는 상상.


5.
동절기 맞이 옷장과 침구 교체를 완료했다. 늘 나보다 먼저 검사하시고 자리를 맡는 두 고양이. 먼지가 폴폴 날리는대도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녀석들이 늘 나보다 먼저 추위를 느낀다. 추워지면 밤에 따뜻한 곳을 찾아 내 품을 파고 든다. 그러면 나는 아, 가을이 왔구나 생각한다.


6.
내일부터 다시 시작될 직사각형의 일상을 미리 그려본다.
나는 일을 꽤 잘 해내는 편이라 큰 무리 없이 해내겠지. 더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도 알고 있다. 좋은 대답은 몰입을 해야 하는 것이고, 더 명확한 대답은 그 일을 사랑해야 한다. 나는 몰입은 할 수 있지만, 사랑하기는 힘들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내가 매일 하는 일이 진정으로 효용 있고 가치 있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큰 비전을 위한 작은 발걸음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으나, 그럴만한 감동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아주 이기적인 바람만 있을 뿐이다.
돈을 벌고, 더 큰돈을 벌고. 이러한 굴레를 가끔 현실을 살다가 멀리 떨어져 생각이 들면, 너무 지겨워서 몸서리가 처진다.

이런 부유하는 생각들을 접고 이제 랜딩 할 때다. 지면에 잘 착지해 있어야 또 날아갈 수 있다. 그러면 그 해방감도 몇 배일 것이다. 적절한 구속과 그 안에서의 자유, 그리고 가끔은 벗어나 날아갈 자유. 두 발 납작하게 잘 붙여서 걷고 뛰어야지.

'사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똥강아지  (1) 2023.11.19
겨울의 이상과 의지  (0) 2023.11.17
꼼꼼하고 촘촘한 8월  (0) 2023.08.28
장마 끝 폭염 시작  (0) 2023.07.28
반 년만에 다시 수영 시작  (1) 2023.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