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이야기가 무엇인지 할머니도 나도 모른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할머니의 백발과 나의 흑발이 동시에 살랑인다. (…) 나는 무대에 서서 수십갈래로 뻗어나가는 내 인생을 본다. 그 중 살아볼 수 있는 건 하나의 생뿐이다. p.29
우리는 더 이상 천둥번개에 울지 않는다. 우리를 울리는 건 다른 문제들이다. p. 90
찬바람이 불면 왠지 속이 깊어져야할 것만 같은데, 더 잠잖아지고 어른스러워져야 할 것만 같은데, 아마도 잘 되지 않을 것이다. p.101
자신의 안팎을 오로지 혼자서 가꿔온 사람도 있을까.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이제는 내 삶이 타인들의 시선에 대롱대롱 매달린다는 것을 어떤 유감도 없이 이해한다. p.137
우정은 서로에게 좋은 대명제를 주는 일. 돌아가면서 핀 조명을 쏘아주는 일. p. 138
잘 써야만 하는데 자신이 없는 원고를 마주할 때면 서툰 수영 실력으로 파도에 담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 그러니까 이것은 인생을 감당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p. 212
짧은 연휴동안 두 여자의 책을 읽었다. 하나는 현재를 뜨겁게 살아가는 젊은 여자 이슬아 작가와 뜨겁게 살다 세상을 따끈하게 데워 놓고 가신 고 박완서 작가의 글이다. 이슬아 작가는 끝내주는 인생이었어, 말하고 싶다 하고, 박완서 작가는 아직 기대에 부풀어 사는 노인이고 싶다 한다.
이슬아 작가는 쉬지 않고 감사하고 쉬이 서글퍼하며 그 마음을 글과 행동으로 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 요가원이 팬더믹으로 문을 닫게 되었을 때 빵을 한 가득 사서 선생님의 집 앞에 두고 왔다는 이야기에서 마음 한 켠이 아릿했다.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시골 강연에서 한 백발의 할머니가 “작가님이 꼭 결혼하면 좋겠어요. 애도 낳고요. 그럼 또 얼마나 이야기가 생겨나겠어요? 나는요. 계속 달라지는 작가님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듣고 싶어요.”라고 했구나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만, 그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은 분명 다른 삶이라 느껴진다. 마침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 그녀의 결혼 소식이 올라왔다. 엇비슷한 매일 속에서도 이슬아 작가가 보는 시선과 그 시선이 만들어내는 따뜻한 충돌들의 이야기가 나도 궁금해져 설레인다.
이슬아 작가는 할머니에서부터 자신까지, 이어지는 여성의 계보를 자주 얘기한다. 자주 등장하는 이슬아 작가의 엄마는 복희씨다. 우리 엄마 선희씨가 떠오른다. 나를 ‘봄아’라고 부르며 환하게 웃는 데 그게 참 예쁜 선희씨. 그녀와 나는 닮은 점도 많고 다른 점도 많다. 닮고 싶은 점도 많고, 그렇게 살기 싫은 점도 많다. 계보라는 건 우리가 쭉 이어져온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가 만들어지겠구나 생각하니 재밌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내가 써내려가고 싶은 내 이야기가 곧 그녀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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