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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알베르 카뮈 : 그저 ‘인간’이고 싶다는 그들

by readingcats 2016. 9. 13.

 

현재는 견딜 수 없고, 과거와는 적이며, 미래는 빼앗긴 채,
이를테면 우리는 인간의 정의 또는 증오심 때문에
철장 뒤에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과 참으로 비슷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카뮈의 <이방인>과 <최초의 인간>을 읽고 나서, 이번엔 그의 가장 긴 소설 <페스트> 차례다. 일본 여행 중 읽을 소설을 찾으려고 서점에서 책을 집어서 몇 장씩 읽어보고 고른 책. 단번에 몇 장이 후루룩 넘어갔다. 잔뜩 기대한 채로 구입하고 일본에 도착해서 카페에서 읽기 시작했다지. 뭐… 너무 기대를 했던 탓인지, 기대치에 70%정도만 부합. 사실 잘 몰입이 되지 않았다.
페스트(흑사병)이 발병한 오랑이라는 지역에서 의사 ‘리유’를 중심으로 극한의 전염병으로 인해 벌어지는 비극을 그린다. 그리고 서술자는 최대한 사실에 근거해서 쓰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더욱 처절하다. 보여주는 인물들은 몇 명이지만 그들은 인간 전부다. 그들이 느끼는 것이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

2차 대전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전쟁 이후에 가장 많이 읽힌 소설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 비극의 과정 묘사에 많은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인 듯하다. 별 어려움 없이, 별 재앙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나에게 ‘페스트’는 어떤 의미일까. 소설에서 랑베르는 누구나 가슴속에 ‘페스트’를 품고 살아간다고 한다. 재앙이란 어떤 것일까. 인간 역사에 있어서 종말을 야기할만한 사건이어야 할까. 개인 인생에서 비극 또한 그 누구에겐 재앙일 수 있다. ‘페스트’는 지금까지의 내 짧은 인생에 공감갈 만한 사건을 떠오르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 나에게 ‘페스트’는 올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떻게 방향을 잡아, 어떤 미래를 상상할 것인가. 라는 물음을 남긴다.

읽는 와중에, 다 읽고나서 ‘또 읽어야지’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고. 그 어느 날, 나에게 ‘페스트’가 왔을 때. 또는 지나갔을 때. 나는 펼쳐볼 것 같다.
큰 아픔(비극)을 성장통이라 묘사하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은 분명히 제 3자다. <페스트>에서 파늘루 신부같은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죄때문이며, 그로 인한 재앙이라고 외치는 잔인한 사람. 혹은 무지한 사람. 결국 파늘루 신부도 오랑의 시민을 ‘여러분’에서 ‘우리들’이라고 바꾸기는 한다. 그러나 그 전까지 그는 너무 멀리서 보았다. 어느 누구가 죽을 이유가 있나요. 라는 분노를 갖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더 잘 묘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의사 ‘리유’다. 그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는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 명씩약간의 호기심만을 느꼈을 뿐이다. 그것이 내가 가장 몰입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유는 자만심때문이었다. 나에게 ‘페스트’라는 건 없을 거라는 오만함, 극 중 인물들은 모두 나약하다는 자만함. 사람은 자만할 수록 빨리 패망한다 했던가…
그래도 그 중, 가장 매력있는 사람은 ‘타루’였다. 그가 남긴 호기심 어린 메모들이 재밌어서였다. 특유의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본 것을 꼼꼼하게 적은 그는 자신의 생각은 글로서 드러내지는 않았다. 말로써, 행동으로써 나타내었다. 그에게 가장 애정을 느꼈던 장면은, 다름 아니라 죽음의 순간이었다. 그는 참으로 낭만적으로 싸웠다. 페스트의 마지막 발악에 그는 ‘지는 싸움’을 했다. 그토록 열망하던 평화를 비로소 찾은 그에게 조의를.

가장 신선했던 이유는 가장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그 어느 과정도 없이 당연한 이야기로 당연하지 않은 듯 나의 속마음까지 보여주어 조금은 놀랬다. 재앙이 벌어진다면 어디에나 있을 그런 사람들, 그리고 나. 나는 재앙 속에서 어디에 위치할 것인가. 영웅이 되려는 어줍잖은 마음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내’가 되는 것이다. 그런 비극속에서 나는 ‘나’를 붙잡고 놓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는 것이다. 표면이 다 벗겨진 속 알갱이만 남을 그 날에. 나는 그냥 그저그런 ‘척쟁이로 남지는 않을까.

 


 

현재는 견딜 수 없고, 과거와는 적이며, 미래는 빼앗긴 채, 이를테면 우리는 인간의 정의 또는 증오심 때문에 철장 뒤에서 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과 참으로 비슷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결국 이 참을 수 없는 휴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상상으로라도 기차를 다시 달리게 하는 것, 완강히 침묵하는 초인종 소리를 계속 울리게 해서 시간을 가득 채우는 것 뿐이었다. (p.96)

“이해 못하세요. 이성적인 말씀만 하실 뿐입니다. 그저 남 이야기하듯이 추상적이시라고요.” (p.113)

“(…) <그리고>와 <그러고 나서>사이의 선택은 벌써 더 어렵지요. 진짜 어려움은 <그러고 나서>와 <그 다음에>를 만나면 더 커지죠.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어려운 것은 <그리고>를 적을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아는 거랍니다.” (p.134)

랑베르에게 있어 그 이후 시기는 가장 편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힘들기도 했다. 무기력한 시기였다. (p.140)

“주정뱅이들 말고는 아무도 웃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 지나치게 웃는다.” (p.153)

“(…) 하지만 제게는 필요한 만큼의 자존심이 있을 뿐입니다.” (p.165)

“(…) 그러나 세상의 질서란 죽음에 의해서 해결되니 만큼 어쩌면 신으로서도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고, …” 

“누가 그런 것을 다 가르쳤나요, 선생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가난입니다.” (p.167)

한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덜 무지하거나 더 무지하다. (p.171)

이 진실은 훌륭하지도 않았고, 단지 논리적 귀결일 뿐이었다. (p.173)

“천만에요. 인간이란 고통도 오래 견디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행복도 오래 유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가치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죠.” (p.210)

“인간이란 하나의 관념이 아닙니다, 랑베르.” (p.210)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있다니까’라는 말은 그 당시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을 잘 담고 있다. (p.217)

그리하여 어느 여름밤 꽃들과 시체들을 싣고서 흐느끼듯 더욱 더 온몸을 흔들어 대는 열차소리가 들려왔다. (p.228)

요컨데 당시 그들에게 기억력은 있었지만, 상상력은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p.231)

사랑이란 조금이라도 미래를 요구하는 법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에게는 순간들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p.233)

“(…) 게다가 이 도시에서 저는 분노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p.278)

더 이상한 것은 그가 ‘여러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제는 ‘우리들’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p.284)

“(….) 나는 영웅주의라던가 성스러움 따위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p.327)

빈 손에 비통한 마음 뿐, 무기도 없고 대책도 없이 또다시 이렇듯 참담한 패배 앞에서 그는 그저 강 저편에 그대로 있어야 했다. (p.370)

하지만 도대체 리유가 이긴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 안에서, 그러니까 평화가 그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어져 버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평화를 찾았다. (p.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