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울 능력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나태의 징표다.
(…) 한가로움은 기분전환이 아니라 집중을 돕는다.
내가 한병철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았다. 그는 완벽한 음모론자가 아닐까. 2014년 <차이트 ZEIT Wissen>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보았다.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그의 말에서 비판하는 힘의 원천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를 보고, 우울해질 줄 알았는데 나는 더 에너지를 얻었다. 더 기대가 됐다. <시간의 향기>는 대충 어떤 내용을 말하리라 예상이 되었다. 우리는 ‘느긋함’과 ‘머무름’을 잃었고,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세세하게 파헤친다. 이렇게 집중도, 밀도있게 우리의 직접적인 일상을 파헤쳐서 민낯을 고하는 글은 보기 힘들었다.
‘머무름’을 잃고, 난 그로 인해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도, 나의 사고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였다. 나와 모두의 고민인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라는 생각. 그 생각을 뿌리 채 뽑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진정한 시간의 압박으로부터의 자유는, 시간에 나를 맞추지 않을 때일까. 사실 그러기엔 사회의 통념과 싸워야 해서 쉽지 않다. 단지 내 스스로 무언가 ‘해야 한다’라는 착취에서 자유롭기를.
그의 다른 책들은 사회에 대한 시각이 트이는 데 많이 도움이 되었다. <시간의 향기>는 나 스스로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였다. 나는 ‘시간’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 지, 스스로를 시간이라는 관념 안에 가두면서 만족하고 있었는데, 과연 그 속에서 나는 진정 ‘나’다웠는 지. 그래서 많이 곱씹었다.
시간은 단지 우리가 정의한 하나의 관념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는 약간의 충격이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시간의 노예였던 것이다. 노예 상태가 나쁘다고, 잘못됐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단지 그 놈이 어떤 놈인지도 모른 채 ,나의 이 상태가 당연하다고 느껴온 것은 분명 나의 잘못이다. 그런 맥락에서 <시간의 향기>에서 나는 시간이 어떤 놈인지 꼼꼼히, 천천히 되짚어 보기도 했다. 아직 실체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고, 내가 시간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 지 가늠이 잘 되지 않지만.. 첫 걸음마를 떼었다고 해야 하나.
시간은 마치 산사태처럼 마구 무너져 내리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이 자기 안에 아무런 받침대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p.25)
인간은 여전히 시간에 대해 자유롭기보다는 내던져진 입장에 처해있다. (…) 시간은 소여, 즉 주어져 있는 사실이다. (p.38)
시간이 예전보다 빨리 흘러간다는 느낌도 뚜렷한 시간의 분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 즉 경험이 되지 못한 채 빠르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버리는 까닭에 더욱 더 강화된다. (p.52)
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받침대 없이는 자유도 없다. (p.62)
인간은 짧은 난비의 단계를 넘기고 다시 걷는 자로서 땅 위로 돌아올 것인가?
또는 땅의 무거움, 노동의 무거움을 아예 벗어던지고 가벼운 유영을, 유영을 하는 듯한 느긋한 방랑을 그러니까 부유하는 시간의 향기를 발견할 것인가? (p.66)
세계가 온통 여기가 되어버림으로써 저기는 제거되고 만다.
(…)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을 분리하는 문턱이 사라진다. (p. 70)
순수한 형식 유희로서 디자인, (…) 즉 어떤 깊은 의미도 없이, 어떤 초감각적인 것도 없이 단순히 만족감만을 아는 아름다운 가상 (…)
순간적인 광휘나 자극이 아니라 사물들의 잔광, 사물들의 여운이 아름다운 것이다. (p.84)
미학은 마비의 위험에 저항하기 위한 처방이다. (p.91)
“내가 나의 꽃들을 얻기 전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p.95)
왜 오후가 지나가는 것이 아쉽겠는가? 오후의 향기 뒤에는 저녁의 좋은 냄새가 따라올 것이다. (p.100
바로 적극적 행동에 나서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권태를 깊게 만든다.
(…) 권태는 결국 시간의 공허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p.129)
과도하게 고양된 주체성이야말로 깊은 권태가 생겨나게 한 주된 원인이라는 것, 더 많은 자기 생각보다는 더 많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더 많은 행동보다는 더 많은 머무름이 권태의 저주를 깨뜨릴 수 있다는 것. (p.134)
한가로울 능력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나태의 징표다.
(…) 한가로움은 기분전환이 아니라 집중을 돕는다. (p.142)
일의 지배는 너무나 완벽해져서 노동시간 바깥는 오직 때우고 죽여야 할 시간밖에는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p.149)
의식의 완전한 자유는 의식이 일하라는 명령에서도 해방될 때만 가능하다. (p.157)
안단테 (…) 열정적이고 느린 정신의 템포
-프리드리히 니체 (p.161)
“결코 개별적이고 유일한 특정 인간으로서 활동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 활동적인 사람들은 돌이 구르듯이 구른다.”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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