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있다.

사실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p.34)

인류는 매년 완벽한 상태를 향해 진보한다는 세계관이 자리잡았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그 중심에 자리 잡은 특별하고 새로운 이상, 즉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하며 누구나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제임스의 방정식에 따르면 이 사회는 요구를 잔뜩 늘여놓는 바람에 적절한 자존심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p.65)

프롤레타리아에게 잃을 것은 사슬밖에 없으며, 얻을 것은 온 세상이다.

감정은 적을수록 좋다. (p.104)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p.110)

승자는 운을 만든다. 이것이 현대의 주문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피고용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바퀴가 계속 굴러가게 하기 위해 치는 기름과 같다. 노동의 진정한 목적은 이제 인간이 아니라 돈이다.” (p.124)

진지하게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상업적 체제의 논리 때문에 언제나 경제적 요구가 선택된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 때문에 느끼는 불안의 좋은 치유책은
세계라는 거대한 공간을 여행하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술작품을 통하여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진정한 행복이 자리를 잡기에는 너무 초라한 곳이다”
– 쇼펜하우어, <소품과 단편집>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세상을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낫고 더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갈망”

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소설은 감추어진 삶의 목격자이기 때문에 지배적인 위계 관념에 상상의 평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 (p.159)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삶, 즉 사랑의 힘, 기쁨의 힘, 감탄의 힘을 모두 포함하는 삶 외에 다른 부는 없다.” 

카를 마르크스의 유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믿음들은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p.241)

우리가 시간에 도전할 수 없다는 사실 (p.277)

공동체가 부패할수록, 개인적 성취의 유혹도 강해진다.

“보헤미아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다.” (p.304)

어떤 사람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것이 많다는 것이다. 시인이 걸을 수 없는 것은 큰 날개 때문이다. (p.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