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순간 순간이 영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변에서 추천을 많이 했다. 아직 안 읽어봤으면 꼭 읽어보라고. 내심 기대를 갖고 소설에 빠져들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흡수당했다. 주인공의 진지한 철학은 잔잔하게, 조르바의 강렬한 삶의 냄새는 강렬하게 나를 잡아 끌었다.
‘소설’의 역할은 어디까지 일까? 작가의 고민은 얼마나 깊었던가. 문학이 위대한 이유는 작가의 고민과 나의 고민이 맞닿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문학의 진정한 재미를 위해서는 독자에게도 노력이 필요할 터.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대해 고민해 본 적있다면, 조르바의 말로 그것은 바로 ‘인간’이고, 이 책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책의 소장가치란 나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두고두고 읽고 싶거나, 그 책이 워낙 매력적이라 내 곁에 두고 싶거나. 이 책은 두 가지 모두에 속한다. 주인공처럼 나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정복하고자 하는 욕구에 현재 머물러있다. 옛날 책들을 옆에 끼고서(모든 책은 옛날 책이라는 전제), 나의 머리에 담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에겐 본성이 있고 생명력이 있다. 그 생명력을 찾고 싶을 때, 머리로는 담기지 않는 대지의 숨결을 느끼고 싶을 때 꺼내보고 싶은 책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의 ‘뱀’과 ‘대지’가 이 책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니체도 그렇고, 책의 주인공도 그렇고 불교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강조한다. 이 ‘순간’의 영원함을. 대지의 상징성은 알렉시스 조르바로 대체된다. 그는 마음껏 욕심내지 않는 자이다. 모순같지만, 그는 정말 그렇다. 많은 지성인들이 펜대를 굴려서 찾았던 인간의 자유성을 조르바는 온 몸으로 실천한다. 그리고 춤을 춘다. 그에게 춤은 하나의 언어이며 펜대이다.
특히나 추천하고 싶은 사람은, 어정쩡하게 대지에 발 붙인 사람들, 그리고 대지보다 책을 사랑하는 타락한 사람들(책 인용)이다.
단순하게 읽는다면 조르바를 그저 자유로운 영혼쯤으로 오해하기 쉬울 것같다. 하지만 조르바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든 언어로 규정짓고자 한다면 그건 조르바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조르바의 말처럼 그는 말 그대로 ‘조르바’이다. “내 정열을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뿐이요”라고 외치는 조르바에게 나는 푹 빠져버렸다.
그리고 조르바와 닮았으면서도 상충하는 글쓴이의 생각 또한 신선하다. 그는 그 나름대로 그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조르바는 아니라고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둘 중간 쯤에 위치한다.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는 누구의 몫일까. 나를 어떻게 자유롭게 둘 것인가.
필사
고통은 꿈이며, 인생은 재미있는 연극이어서 촌놈이나 바보만이 무대로 뛰어올라가 연기에 가담한다는 듯이… (p.10)
미래라는 게 예견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이별은 얼마나 다른 것일 수 있었을까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아직 모태(母態)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에게 버릇 들게 된 것들, 예사로 보아 넘기는 사실들도 조르바 앞에서는 무서운 수수께끼로 떠오른다.
그 사람들 눈 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그래, 뜨여 놓았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비참해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 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예요…
나는 언어에 감금되고 언어에 의해 타락한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여자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어요? 한다는 짓이, 처음 만난 사내와 붙어 새끼를 까놓는 게 고작이오. 사내에게서 뭘 기대할 수 있겠어요? 사내들이란 그 덫에 걸리고 맙니다.
내 정신을 육신으로 채워야 했다. 내 육신을 정신으로 채워야 했다. 그렇게 하자면 내 내부에 도사린 두 개의 영원한 절대자를 화해시켜야 했다.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나는 반항합니다.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세계를 정복해야 하니까요.
나는 타락해있었다. 여자와의 사랑과 책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라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내가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이 내 노예인 것. 나는 일의 노예이며 내가 처해 있는 노예 상태를 자랑으로 여기네.
죽는다는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끽 하고 죽고 촛불이 꺼지고, 뭐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나 늙는다는 것은 창피한 노릇입니다.
당신 속에도 악마 한 마리가 있지만 아직 이름은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걸 모르니까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 거예요. 두목, 그놈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름을 지어주세요. 그럼 아마 좀 나아질 겁니다.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나는 반항 합니다.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세계를 정복해야 하니까요.
유치한 이상이여! 그러나 그런 이상을 비웃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모든 형이상학적인 근심인 언어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염려에서 내 마음을 해방시킬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접촉을 가질 것.
그런 걸 꼭 내게 물어봐야 하나요? 우리가 여기 온 건 그것 때문이 아닌가요? 생각을 실천한다는 것.
아무렴. 무릇 위대한 환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았던가!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순간 순간이 영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단어 한 단어를 정복하면서 나는 흡사 위험에서 벗어나 무럭무럭 발전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겨우 말을 바꾸어 놓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셈이다.
순간 순간 죽음은 삶처럼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내 말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이것 봐요, 당신이 춤을 배우고 내 말을 배우면 우리가 서로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어디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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