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는 모든 인간 능력이 전례없이 영웅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출발했지만, 결국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귀결되고 만다.
이 시대에 대한 한병철의 ‘우아한 비평’이라는 책 슬로건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지겹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한 시대에 대한 비판, 그 다음 시대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들이 보이지않는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이 피로에 익숙해져서 느끼지 못했던 ‘피로 사회’의 일원이었다. 이 피로는 언제 끝날 것이며,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책을 읽으며 너무 카타르시스적이어서 남들도 느껴보았으면 한다. 한병철에 무조건 동의는 아니지만, 지금 시대에서 의문스러웠던 부분들을 현실에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가장 와닿는 것은 ‘우울증’에 대한 그의 시각이다. 정신병리학적, 생리학적인 접근이 아닌, 사회와 이념의 맥락 속에서 우울한 개인을 풀어낸다. 한 번도 우울한 적 없는 자, 이 시대의 사람이 아니다.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 저물고 있나보다. 우리를 턱 밑까지 조여왔던 공리주의, 자본주의, 성과주의는 한계가 뚜렷하다. 어느 시대보다 가장 뛰어난 세대인 우리는 모든 것의 원점으로 돌아갔다. 모든 걸 안다고 생각했던 인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공허한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 공허한 상태에서 사회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피로해져간다.
현 시대를 그 만의 신선한 관점으로, 언어로 사회를 바라보고 풀어나간다. 한병철의 시각은 현대를 보고 있어 더 생동감있다. 피로해져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들이 꺼내어진다.
흘러가는 대로 세월아 네월아, 지내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본인의 생각이 결여되어 있는 한량은 나쁜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이성을, 본성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낭비다. 모든 역사를 알 필요는 없지만 내가 속해 있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까.
필사
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보드리야드
21세기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하지만 정작 니체라면 대중의 현실이 되려고 하는 저 인간형을 가리켜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이 시대는 모든 인간 능력이 전례없이 영웅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출발했지만, 결국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귀결되고 만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인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 나가기 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스적 주체는 완결에 이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결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자유에서 새로운 강제가 발생한다는 데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생한다.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 삶과 대지를 사랑한 남자, 조르바의 이야기 (0) | 2016.09.13 |
---|---|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대심문관의 전설을 끝내지 못한 미완의 대작 (0) | 2016.09.13 |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 일상은 협상의 연속 (0) | 2016.09.13 |
<칼의 노래> 김 훈 : 이순신의 마음 읽기 (0) | 2016.09.13 |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 풍족안의 결핍, 정의 (0) | 2016.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