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패러다임 자체가 반성의 대상으로 부상한다는 것은 그 패러다임이 몰락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인 경우가 많다.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
-보드리야드

21세기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하지만 정작 니체라면 대중의 현실이 되려고 하는 저 인간형을 가리켜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이 시대는 모든 인간 능력이 전례없이 영웅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출발했지만, 결국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귀결되고 만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인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 나가기 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스적 주체는 완결에 이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결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자유에서 새로운 강제가 발생한다는 데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생한다.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