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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바우하우스 100주년 필름과 메모

by Summer_bom 2023. 7. 29.

4년 전 여름, 베를린에 갔었다.

2주간의 긴 휴가를 내고 혼자서 가고 싶던 유럽의 두 개의 도시를 다녀왔다. 베를린과 암스테르담. 두 도시를 콕 찍은 이유는 바우하우스 100주년이라는 소식을 접하고다.
디자인으로 밥 벌어먹고 산 지 4년 차였다. 회사는 가파르게 성장했고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엄청난 발길질을 해대던 때였다. 그러다 잠시 정체기. 재미가 없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정말 내 마음에 드는가? 내가 디자인이 질려버린 게 아닐까? 그런 근본적인 질문과 회사에서 대우하는 디자이너의 존재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존재의 차이에서 더 크게 질려버린 시점이었다.
그래서 떠난 디자인 여행. 디자인의 제일 처음으로 가보자, 하며 데사우 바우하우스를 가고 싶었다. 그리고 하나의 장르가 된 더치 디자인의 본고장 암스테르담으로.
한창 유행하던 필름 카메라를 갖고 여행 갔던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딱 만 4년이 지난 시점에 현상을 했고, 박제되었던 그날로 다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여행 내내 가지고 다니며 끄덕인 일기장에 그날의 생각의 흐름이 다 담겼다. 9시, 출발하기 전 기차에서와 바우하우스에서 오후 1시 바우하우스 안에 있는 카페에서, 그리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그날의 모든 기록들이다.


 

2019. 7. 9. 9:00 a.m. at Beriln Hauptbhnhof DB
꽤 순조롭다. 데사우행 기차를 기다리는 중. 정말 운 좋게 7월 10일엔 방문을 못한다는 공지를 어제 보았다. 선견지명 있나 봐.
조금 찬 바람이 들어오는 기차와 함께 세진다. 오늘은 하늘도 깨끗하고 해도 잘 든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무것도 없는 파란 하늘을 보고는 만세를 외쳤다. 가장 고대하던 날, 유일하게 기대한 곳.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곳. 설렌다. 아침도 든든하게 먹고 상쾌하게 화장실도 다녀왔다. 뭉게뭉게 큰 구름이 돔 천장사이로 보인다.

 

2019. 7. 9. 10:00 a.m. in DB Train
졸린데 선뜻 자기가 그렇다. 너무 낯선 곳이라 겁나는 것 하나, 놓치기 싫은 장면을 지나칠까 봐 둘. 갈수록 날이 흐려진다. 옅은 비도 오고. 두 다리 뻗고 앉았다. 오늘은 아마 라이프치히까지 가는 건 무리겠다. 내일 다시 오던지 해야지. 싯다르타를 가져오길 잘했다. 꿋꿋이 헤쳐나가고 아파했다가 다시 환희에 찼다가, 내면에서 많은 일이 일어나고 그것에 집중한다. 홀로 여행에 잘 어울려. 나도 내면의 내게 솔직한 여행을 하고 있다. 무서웠다가 용기 냈다가, 허세 피웠다가 쭈굴 했다가. 솔직해지자고 계속 마음먹는 하루하루다. 왜냐면 그럴 수밖에 없거든. 허세가 통하지 않는다. 

 

100주년 기념 조형물
수업하던 강의실
학생 기숙사 전경
교수실 올라가는 계단

 

학생 식당

 

I.O. Coffee in BAUHAUS

2019. 7. 9. 1:00 p.m at I.O. Coffee in BAUHAUS
한 차례둘러본 바우하우스. 식사까지는 아니어서 치즈케이스와 커피 한 잔 마셨다.

모든 게 아름답다. 계속 떠도는 생각, 아니 문장.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가 아니라 "기능은 형태를 따른다". 디자인의 최초라 부를 수 있는 이곳은 형태였다. 기능을 아름답게 승화시켰다. 새로 만들어냈다. 기능에 얽매이도록 두지 않았다. 종종 '직관적'이라는 말을 남용한다.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직관적인 것은 아닌데. 경탄을 하게 하는 것. 아까 화장실에서 본 버튼처럼 충분한 것. 충돌을, 충동을 유발하지 않는 것. 속이지 않는 것.
좋은 걸 먼저 주려고 할 것. 얄팍하게 이용하지 않는 것. 여길 보니 여기서 일하고 싶어졌다. 정직할 다짐을 또 한다. 선해지고 유해지는 기분을 느껴. 그리고 그 방향이 옳다는 것도. 난 보잘것없지 않다. 가능성이지. 테라오겐이 말한 것처럼. 이걸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이면 노력할 가치와 이유가 충분하다.

 
 

교수들 집


 


2019. 7. 9. 6:00 p.m at Train to Beril from Dessua
조금 뒤에 출발하는 기차 안이다. 내 칸에는 아무도 없다.

바우하우스는 천국, 그냥 천국이었다. 오픈 때 가서 마감까지 진짜 꽉 채웠다. 바우하우스를 보며 가상의 대화를 해보았다. 나는 디자이너인가, 직장인인가? 요즘엔 직장인이다. 지쳤다. 내가 잘하는지 모르겠고 디자인을 하는 건지 찍어내는 건지 잘 모르겠다. 좋은 디자인을, 한 땀 한 땀 애쓴 디자인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뭔가 싶었다. 이런 걸 하고 싶었던 걸까. 할 수는 있을까.

지금까지 해온 게 이것뿐이라 어쩔 수 없이 하는 걸까. 소질은 있나. 너무 위대한 현상 앞에서 감탄하는 동시에 좌절했다. 이런 기념품은 아무것도 아니다. 딱히 갖고 싶지도 않다. 소유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디자인된 게 아니다. 필요애 의해, 더 나아짐을 위해.
혼란스럽다. 열정을 찾고자 갔던 바우하우스에서 확인사살당하고 온 듯하다. "너 가짜야". 진짜 디자인을 하고 있긴 한 거야? 진보할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거냐고. 아주 조금이라도.
갑자기 내가 하는 것들이 하찮아 보인다. 작은 발걸음을 존중 않는 게 아니라, 비전 때문이다. 뭐 때문에..? 무엇이 나아지는데..? 근데 문제, 진짜 딜레마는 다른 것이다. 나도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 누군가에게 배우고 싶은데 역량이 달린다는 것. 그리고 그다음 단계를 넘어갈 방법을 모르겠다. 생각의 갈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