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도 ‘여자는…’이라는 말을 한 적 없는 아버지와 신라 시대에 태어났다면 대장군이 되었을 어머니는 내가 나의 시대에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주셨다.

이런 말 하면 발끈하는 남성도 있겠지만,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의 한 문장에 격렬히 동감하는 바이다.

‘여성은 여전히 싸워야할 유령이 많고, 극복해야할 편견이 많습니다’ (p.166)

 

역설적이게도 내가 여성이란 틀을 신경 쓰지 않을 때, 오히려 저 문장이 떠오를 때가 많았다. 방심할 때 유령처럼 엄습하기 때문이다.
난 잘살고 있는데 갑자기 자신의 편견을 요구하는 순간엔 아주 당황스럽다.
‘어린 여자 주제에’라는 말은 차라리 괜찮다. 그런 생각을 심은 당신의 환경이 안쓰러울 뿐.
하지만 ‘에이, 그래도 여잔데…’라는 말은 그야말로 짜증을 유발한다. 화도 안 남.

 

본인은 챙겨주고 책임져야 한다는 위치에 있는 양, 배려한다고 착각하는 저 생각. 다그칠 수도 없어서 그냥 답답할 뿐.
그러면 그냥 ‘아…. 괜찮아요’ 라고 말해도 상대 쪽에서 먼저 매우 소름 끼치게도 내 말은 웃으며 무시해버린다. 이런 사악한 천사를 보았나.

같은 틀에서, ‘레이디 퍼스트’나 ‘여자는 약자’라는 말도 구질구질해 듣기 싫다. 이 말이 오히려 옥죈다. 빠가 까를 만든다고 했지….
여성의 권리는 ‘약함’에서 나온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큰 오판이다.

그래서 ‘여성적’이라는 단어에 매우 거부감이 있다.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하지만, 그는 책에서 변명하고, 달라붙는 것을 ‘여자처럼’이라고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시리즈를 좋아하지만 교묘한 술책을 쓰는 걸 ‘계집애 같은’이라는 단어로 묘사한다.
그걸 보고 화를 내는 건 더 이상하다. 그 시대에 ‘옳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200년 이상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여성적’이라는 말은 정말 싫다.

 

사소한 것에도 분노할 수 있는 시대다.

그리고 분노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 나아질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내가 가진 사소한 분노의 대상은 바로 ‘여성적’이라는 단어다. 소심하고 눈치를 많이 보고 기대고 싶고, 의지가 박약한 것은 그냥 본인이 그래서이다.
그것을 ‘여성적’이라고 이름 붙이는 건 남녀 모두에게 모욕이다.

남성에게 그런 말을 붙인다는 건, ‘남자다움’에서 멀어진다는 의미.
이 얼마나 불쌍한가. 남자는 왜 의지하면 안 되고 소심할 수 없는지. 그래서 남자가 먼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그 ‘남자다움’의 무게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먼저지 않을까.
여자는 불리하면 그냥 ‘나 여자잖아…’ 하고 여린 척하면 된다지만, 남자는 그 무거움을 어떻게 견디려고?

 

부러운 윤정수

자신한테 원래 없던 단호함이나 박력을 갑자기 만들 수는 없으니 뒤로 자꾸 숨는다. 그 편견에 맞서는 건 대부분 여자고, 또 ‘여자같이 보이기’ 때문에.
오늘날 남성의 어두운 전체주의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제발 그들에게 약해질 자유를 주고, 여성을 책임지지 않아도 될 자유를 주었으면 한다.
그냥 본인의 성향을 존중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진정한 방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