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백수가 된 이유

백수가 된 지 한 달이 되어 간다. 첫 직장이었고, 첫 퇴사였다. 이력서에 처음 적히는 나의 경력 한 줄이었다.

백수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순했다. 매일 돌아오는 태양이 어제도, 그제도 있었던 태양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일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의 반복일 뿐이라는 그런 생각.

회사를 다니면서 9개월 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늘 나의 욕구대로, 어느 정도 사회와 합의한 욕구 내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직장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만족스러웠었다. 그렇다고 나는 무한 긍정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비판과 딴지의 아이콘이다. 지금도 여전히,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지금도 신분의 도장만 없을 뿐, 이 노예제에 몸서리치며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를 가두는 어떠한 것도 용서치 못하는 반동 군자이다. 다만,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강한 편이다. 우선 나는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믿는 것이 당연한 이유다. 또 결과라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지켜야 할 ‘내 것’이니까. 이런 모습을 보고 이사님은 나에게 ‘프로의식 쩌네요.’라고 포장해주셨지만..

그런데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에 했던 최고의 선택이 후회되지는 않았지만 또 다시 선택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구나, 하고 느꼈다.

 

#’한다’는 것, 평가의 구속

처음 내가 ‘한다’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은 대학 2학년 때였다. 교직 수업을 들으면서 한 시차의 교육 목표를 설정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시간이었다. 대부분의 교육 목표는 ‘~해서 ~할 수 있다.’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그 강의에서 들었던 말은 지금도 늘 따라다닌다. 학생에게 ‘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목표는 평가를 위해 강요된 행동일 수 있다고. 우리의 교육은 평가를 필수로 하기 때문에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심리는 당연한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문제는 그것이 강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는 행위’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할 수 있음’과 그 결과, 평가에만 의미를 두는 강박. 그래서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무엇인가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한다.

 

이 시대는 모든 인간 능력이 전례없이 영웅적으로 활성화되면서 출발했지만, 결국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귀결되고 만다.
<피로사회> 한병철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개인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신을 죽이고(니체 曰) 야심차게 출발한 우리의 지금 모습은 구질구질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사실은 할 수 없는데, 할 수 있을 것 같은 영웅인 체 해야하기 때문이다. 참 피곤하다.. 나는 맏이에게는 조금씩 다 있는, 되도 않는 책임감이나 부담감이 있어서 잘해 보이는 체 해야만 하는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할 줄 모르면 치열하게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사실 맏이가 아니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제된 콤플렉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도, 너도 불안하다.

 

진지하게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상업적 체제의 논리 때문에 언제나 경제적 요구가 선택된다.
<불안> 알랭드 보통

 

아, 결국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경제적 토대라 했던가(<자본론> 마르크스).. 거창한 이데올로기는 제쳐두고서라도 내 인생으로 들어와 개인적인 결정에서조차 경제적 요구를 선택하는 일은 부기지수. 지금 나는 청년 백수. 앞으로 일을 선택할 때 무엇이 우선이 될까. 소신이 없다면 대부분은 경제적 이득을 보는 쪽으로 선택을 하겠지. 물론 경제적 이익은 여러가지가 될 수 있다. “시간은 금이다”라고 말한 루즈밸트 프랭클린 이후로 시간 또한 화폐의 단위가 되기도 하였으니 시간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할 일 없음’의 상태

어차피 난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났고 자랐으며, 또 평생을 지낼 것이다. (갑자기 눙물이..;;)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거대한 환경.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하나씩 세워나가야 한다. 자본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일하라,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이다. 나는 그 놀음에 놀아나는 말이 되고 싶진 않다. 체제의 거부가 아니라 강요의 거부일 뿐이다. ‘영혼없는 말’처럼 자본이 원하는대로 움직여 줄 마음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사설을 읽는 것은 당장의 성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는 말로, ‘돈’이 되지 않는다. 이런 돈이 되지 않는 일들은 곧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냥 시간많고 팔자좋은 한량이가 하는 활동처럼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난 시간이 많지도, 팔자가 좋지도 않지만, 이러한 ‘했다고 할 수 없는 일’을 지속한다. 나에게 자본이 요구하는 ‘생산성’은 선택하지 않아도 그만인 가치 중 하나일 뿐이다.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피로사회> 한병철

 

나는 심심함을 용서하고자 한다. 내가 ‘하는’ 일들을 충분히 경험하고 이 순간을 건너고 싶다. 경험에는 조급함이 독이듯. 스스로를 착취하며 조급함을 부추기는 자학하는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다만 확실한 ‘NO’의 소신을 갖고 싶을 뿐이다. NO의 힘은 순간의 집중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으며, 그 순간은 아직 오지 않은 걱정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순간에 충실하여 나의 시간을 완성하는 데 에너지를 쏟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