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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영하의 4월

by readingcats 2025. 4. 14.

토독토독, 12층의 높은 건물의 창가에서도, 1층 빌라의 창가에서도 빗소리는 같다. 벚꽃이 만발하고 사람들의 표정에서 개운함이 보이며 이제야 좀 따뜻해지려나 싶더니 영하의 날씨가 갑자기 찾아왔다. 날씨의 변덕이 점점 심해진다.
한의학 치료를 받은 지 한 달 반정도 지났다. 거진 8년을 고생 중인 PMS 증후군이 워낙 심해, 한의원을 찾았었다. 양의학으로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해보았다.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1여년을 살았다. 그러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다. 매달 10일을 이렇게 아픈 게, 말이 돼? 이렇게 앞으로도 살아야 한다고? 그래서 예전에 얼핏 들었던 '생리통 한약'이 떠올랐고 찾고 찾았다.
그러다 만난 지금 다니는 한의원은, 내게 큰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미 처음 만남부터 나는 선생님 앞에서 보호자를 만나 기쁜 아기 고양이처럼 배를 까고 발라당해 버렸다. 진료를 거진 한 시간을 보았는데, 아픈 증상에 대한 이야기는 잠깐이었고 나의 이야기를 했다. 아마 조금만 더 이야기 나누었다면 난 울어버렸을 것이다. 울컥했던 순간이 여러 번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 열고 매주 침 치료와 처방 한약을 병행하고 있다. 큰 변화가 몇 가지 생겼는데, 대부분 좋은 쪽이다. 식욕이 적당해지면서 적정량만 먹게 되어 체지방량 빠졌고, 냉의 양이 확연히 줄었다. 가장 큰 건 마음의 들뜸이 가라앉았다. 내 들뜸은 짜증과 화를 유발시켜서 스스로를 긴장상태로 쉽게 몰아넣었었다. 전보다 자주 욱하고, 감정에 휩쓸리며 불편해지는 경우가 잦아졌었다. 남에게 티를 덜 내기 위해 참아내는 에너지도 많이 들어 혼자서 분을 삭히는 일도 잦았고. 그 빈도가 많이 줄었다. 
한의학에서는 그걸 '화병(火病)'이라고 불렀다. 오랫동안 긴장과 불안, 답답해하며 스스로 분을 삭혔다가 내뿜었다가. 그래도 해결되지 않던 감정의 응어리들이 명치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증상. 그래서 서울대병원에서는 이걸 우울증의 일종이라 정의해두었더라.
젊은 친구가 뭐가 그렇게 억울한 게 많았을까, 라던 선생님의 말에 엎드려 부항을 뜨다가 베갯잇을 적셨었다.
명치에 침을 둔 그 날, 꽉 막혀있던 혈관이 놀라 한동안 가슴 팍이 멍으로 시퍼래졌었다.
 
꽃이 다 폈었다가, 돌풍과 비로 다 흩어져간다. 이제 이 빗물을 마시고 꽃이 진 자리에 봉오리를 뚫고 여린 연두색 잎들이 자라 울창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여린 잎을 가장 좋아한다. 그 잎이 가진 연둣빛과 햇살을 받으면 속살이 다 비치는 투명함이 좋다. 말하고나니 벌써 50대로 접어드는 중년같기도 하네. 전보다 악을 쓰는 힘이 빠져서 그런걸까. 그러면서 화병도 좀 수그러들까. 다음 번, 그 다음 번 명치에 침을 맞을 때는 지금보다 덜 시퍼래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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