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할 때도 나의 주무기는 ‘편지쓰기’였다. 말로 하기 힘든 것을 건네는 방법으로는 최적이었다. 나에게 있어, 말로 하기 힘든 말이라면 ‘사랑한다’라던가 ‘서운하다’라는 별 것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손으로 꾹꾹 눌러서 쓰는 동안 나의 말과 감정은 정돈되었다. 그래서 난 주로 서운하거나 화가 나면 편지를 썼다. 솟아나는 감정의 발화를 정돈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주로  ‘화’나 ‘분노’의 감정같은 것이 해당되었다. 육체적으로 표현되고자 하는 그런 감정들의 다스림으로 편지는 사용되었다.

주로 그런 방식으로 감정을 글로 눌러왔다. 나에게 글쓰기란 그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편지를 전해주고 나면 곧, 모든 내용을 다 잊는다. 편지특기생으로써 수 많은 편지를 뿌리고 다녔는데, 나는 제대로 기억하는 내용이 한 문장도 없다. 글쓰기란 감정의 분출구로써 소모된 종이 조각과 펜의 잉크일 뿐. 의미는 없었고 전해주면 그만이었다.

 

데이터가 된 편지

손이 아닌 손가락으로 표현하는 글도 처음에는 편지였다. ‘이메일(e-mail)’. 글자의 조합이 손가락의 두들김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객관적으로 이방인으로써 바라보기에는 멀리 와버렸다. 다만 여전히 이질감이 드는 사실 하나는, 내가 아무렇게 싸지르는 글은 이제 ‘데이터’의 조각이라는 것이다. 이건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망치고 싶다. ‘자연의 섭리’인 체하는 이 상황이 도무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 자연은 신(神)의 영역, 다스림의 영역. 인간이 오만하기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성역. 이렇게 말하는 나에게 ‘자연스러움’이란 좀 더 고고한 것이어야 한다.

나는 데이터화의 자연스러움 안에 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나에게 글은 종이와 펜으로 분출시켜버리는 감정의 날림이다. 유령처럼 내 주변을 떠도는, 심지어 세계가 종말할 때까지도 ‘데이터’로써 어딘가에 흝어져 있을 01010000… 등의 데이터와는 다르다. 정보는 휘발성이 강하다고 중학교 때 배웠다. 정보화시대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N세대인 나는,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막상 내가 경험하고 있는 정보화 사회에서 정보는 휘발되지 않고 늘 떠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누구의 품 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떠도는 데이터 따위를 만들고자 나는 이렇게 손가락을 두들기는가.

이건 새삼스러운 분노일수도, 짜증일수도.

 

 

 

말장난

“글을 쓰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어. 두렵게 느껴지거든.”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나오코가 편지 서두에 이런 말을 썼을 때는 이게 무슨 말장난이람, 하고 쉽게 넘어갔다. 생각을 입으로 표현할 때는 다른 오감도 함께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눈맞춤, 손짓, 목소리의 떨림. 하나의 공간을 만들기 때문에 사실 ‘언어’의 표현은 그닥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글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종이던 인터넷 공간이던 하얀 배경에 검정 텍스트가 입력된다. 그것이 전부일 뿐. 동반되는 눈맞춤은 없다. 나오코를 보면서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글을 쓰기 무척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가상의 떨림이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고 나서야 언어로 정리되는 것일 뿐.

” 진짜 어려움은 <그러고 나서>와 <그 다음에>를 만나면 더 커지죠.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가장 어려운 것은 <그리고>를 적을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아는 거랍니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처음으로 진지하게 글의 숭고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문장이었다. 그 후에 글을 싸지르는 행위를 자제했다.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러나>와 <하지만>의 미묘한 차이점을. 디자인에서는 늘 말한다. ‘디테일은 끝장’이라고. 나는 그것이 글에도, 하나의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글쓰기 전공자만이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쓰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나의 입장정리가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는 나에게 한동안 분출구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주었고, 또 수행할 글에게 존경과 수고를! 바라는 것은 단지 잘 읽히는 글이 되도록 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