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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위로하는 밤

by Summer_bom 2024. 3. 24.


취했던 날이었다. 새콤한 화이트 와인과 Dst.club이라는 매력적인 공간, 소금의 현대예술 같은 음악과 목소리와 행복해를 연신 외치는 사랑스러운 친구. 책 얘기도 했다가, 아픔도 얘기했다가, 다시 웃었다가, 시시콜콜한 남자얘기도 했다가. 3주 만에 술을 마시는데, 참 들뜨기에 적당한 토요일 저녁이었다.

처음 만나 짧게 말을 나눈 사람들도, 기분도 모두 좋았고, 오랜만에 들뜨는 이 상황 자체에 취했다. 요즘은 내가 가진 우울함이 다른 사람에게 퍼질까봐 되도록 혼자서 고양이들과 시간만 보내고 있는 편이었다. 전쟁에 패배한 무사처럼 주눅 들고 무력해졌고, 바보를 만들어주는 약 기운 덕에 의지를 갖고 무언가 새롭게 할 의욕도 없기도 하고. 번뇌에 휩싸이기보다 바보가 되는 걸 하고 싶었으니 일종의 휴식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다 아주 오랜만에 취기가 돌면서, 몸의 많은 감각들이 꿈틀댔다. 온 피부마다 다시 떠올리는 것 같았다. 등을 쓰다듬던 손길, 작은 내가 다 안길 수있던 품, 꼼지락 깍지 끼던 손, 자면서도 날 찾아 더듬거리며 껴안던 팔. 그리웠다. 그가 보고 싶다고, 친구에게 말하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어루만져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라고. 자기는 지금도 1년 전에 헤어진 그 사람이 보고 싶다고, 근데 감당이 될 것 같지 않아 꾹 참았다고, 얘기를 덧붙였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하나만 걸쳐도 충분한 봄밤. 아 얼마만에 들뜨는 취기인지. 이 취기를 갖고 집에 가기 아쉬워 혼자서 이태원에 펍이라도 놀러 갈까, 누구를 불러볼까, 너무 많은 신세를 진 친구들이 생각나서 미안했다. 그러다 생각난 1년 반 전에 세 번 만났었던 한 남자. 매력적인 이성이었고, 서로에게서 채우고자 하는 것이 비슷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연락하면 바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톡을 보냈고, 전화가 왔다. 전화를 하며 울었다. 잘 지내는 거 아니었어? 아파서 술은 같이 못마셔주는데, 와서 자고 가. 택시를 탔고 그의 집으로 갔다. 나는 간단히 맥주를 마셨고 그는 따뜻한 차 한 잔. 그가 지금 여자친구가 있는지, 컨디션이 얼마큼 안 좋은지는 취해서 이기적인 상태의 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내가 마음이 슬퍼서 위로해 줄 어떤 품과 손길이 필요했으니까. 아구, 장녀가 막내처럼 우네. 나는 그가 나를 장녀라고 불러주는 것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날도 좋았다. 그는 나보다 더 무거운 장남의 무게로 한 걸음걸음이 무거운 사람이니까. 외로움을 너무 잘 알면서 삼키며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그때도 그날도 그는 자면서 날 안아주었다.


다음 날 간단히 아침을 같이 먹고, 건강이 더 안좋아져 보이는 그를 위해 일찍 집을 나왔다. 그제야 많이 민폐였겠다 싶었지만, 어쩌겠어. 내가 이렇게 빚지면 그도 나를 다음에 써먹을 일이 있겠지. 그런 약속을 하고 나왔다. 필요할 때 나 불러달라고, 달려가겠다고. 그 간밤에 그가 연락을 주지 않았다면 나는 혼자서 이태원을 떠돌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기댔을지도 모를 일이다.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면 X에게 연락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어찌 됐든 안전한 사람에게 하루의 밤을 의탁하고, 위로받고 나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며칠 전 <메이 디셈버>의 대사가 생각나네. 어른들의 방식. 나는 이제 이런 관계에서 섣불리 정을 찾고,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욕정만에 휩싸여 도구로 보지도 않는다. 글쎄, 외로운 사람들이 하나의 외로운 밤을 지우는 방법 같은 것, 이라고 하면 거창하려나. 적어도 취했던 토요일은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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