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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에너지

by Summer_bom 2024. 3. 20.

2주만에 다시 정신의학과를 찾아서 약을 증량했다. 처음 약에 어느정도 적응하고 나니, 다시 심장이 두근두근거려 집중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상담에서 얘기했더니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비슷한 증상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끊이질 않고 그 날의 기억이 되풀이되고 그것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며, 집중하기가 힘든, 무기력하고 우울감이 동반되는.

몸이 아프지도 않고 지나치게 피곤하지도 않았다. 주말에는 푹 쉬었고 일요일에는 집에만 은거하며 먹고 자며 누워지냈다. 마음이 많이 지쳐 어떤 것에도 의욕이 나지 않는다. 그냥 좋고 재밌는 것 보면서, 맛있는 거 먹으며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제야 알겠다. 많은 상황을 고려하고 배려해 한 치 걱정없이 일을 수행한다는 게 참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거구나. 연차를 쓰기 위해 회사에 알려야했고, 최대한 빨리 너무 늦지 않게 알려야 하고, 오늘 회의가 있는 팀원에게 사유를 잘 설명하고 다음 회의를 잡겠다는 안심까지 시켜줘야 하는 것을 아는데, 그 메세지를 하나하나 작성해서 할 힘이 나질 않았다. 알면서 하기가 싫었다. 손가락에 힘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잘 해내는 것이 힘겨웠다. 그냥 일어나서 맛있는거 시켜먹고 뿌리깊은 나무나 마저 봐야지, 하는 생각 뿐. 10시간을 자고 일어나서도 피곤했다. 약 기운일까, 뇌가 갑자기 천천히 돌아가면서 무리하지 않도록 작동을 멈춘 것일까. 이러나 저러나 몸의 작용이겠지. 어찌됐든 나에겐 이게 필요했다. 이렇게 일주일만 쉴 수있으면 좋을텐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않고, 어떤 신경도 쓰지 않으며 일주일을 보내면 좋을 듯싶은데.

치열하게, 치밀하게, 꼼꼼하게, 실수없이 그렇게 지내는 것에 과하게 집착했다. 나를 많이 연소시켜 펑, 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하나하나 다 잘할 필요없다. 어떤 것은 흘러가는대로, 덜 소중한 것은 그러는대로, 내 마음과 같을 수없는 것은 멀어지고, 통제가 되는 것은 내 스스로 욕망뿐. 아니 그것도 내가 어찌할 수없는 노릇이다. 욕망이 흐르면 흐르는대로. 사는 것은 버겁지 않다. 어떻게든 되는 것이지.

 

다시 출근해서 미뤄둔 연락에 답장을 하나하나 하고, 집안일에 신경을 쓰고, 고양이들 안부를 챙겼다. 잘 살기 위해 정수기 설치와 보일러도 다시 점검해야해서 약속도 잡았다. 출근해서는 쌓인 슬랙 메세지를 꼼꼼이 답장을 했고 그리 복잡하지 않은 플로우를 처리했다. 위클리 날이어서 팀장인 나는 전달할 사항을 모아서 조리있게 잘 전달해야했고, 팀원들의 작업물에 피드백을 했어야 했다. 중간중간 물어오는 여러 질문들에도 답을 성실히 해야했고, 내가 해야할 복잡한 과제도 진행해야 했다. 그 일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졸음이 쏟아졌고 집중이 힘들었다. 

 

유일하게 크게 힘들이지 않고 생각하는 일은 내 감정과 상태를 기록하는 이 일. 타자기를 두드리고 연필을 쥐고 일기를 쓰는 일이다. 그리고 그리 복잡하지 않은 책을 읽는 일. 글자를 갖고 읽고 쓰다보면 마음이 가라앉고 생각이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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