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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잊는 약

by Summer_bom 2024. 3. 11.

저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상담 치료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처음 알게 됐어요. 생각이 끊이질 않고 불안한 감정을 멈출 수가 없어요.

처음 찾은 정신의학과의 진료실에서 내 증상을 줄줄이 쏟아내었다. 차분한 회색 니트를 입은 50대 중반의 남자 의사는 간간히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면서 내 증상을 진료 노트에 적어내려 갔다. 이별 얘기를 할 때는 눈물이 터지기도 했다. 몇 가지 간단한 시험지를 작성하고, 어느정도 기질적으로도 강박 장애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약을 요청했다. 이별에서 온 스트레스로 잠이 오지 않고, 그날의 기억으로 너무 괴로웠기 때문에,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멈추고 싶었다. 헤어지고 쓴 첫 글에서 선언했거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너의 자리를 메우리라고.
6개월을 꾸준히 복용해야 하고, 약 효과는 1주에서 2주 정도부터 있을 거라고 했다.

더 빨리는 안되나요? 그런 약은 없죠, 꾸준히 복용하셔서 약이 몸에 쌓여야 해요. 상담 치료도 꾸준히 하시고, 약은 먹어보면서 용량 조절해 봅시다.
의사의 웃는 모습이 다정한 아이 같아서 신뢰가 갔다. 뭐라도 붙잡고 싶어서 믿고 싶었던 건지도.

처음 먹어서 그런지 약의 증상이 빠르게 나타났다. 6일 째되는 일요일에는 온몸이 무거운 기압에 꾸욱 눌리는 듯한 느낌과 멈추지 않는 졸음이 밀려왔다. 정말 하루종일 잔 것 같다. 여전히 그날의 스트레스로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긴 했지만, 못 잤던 잠을 하루에 몰아서 잤다. 문제는 약이 너무 잘 들어서, 자도 자도 개운해지는 게 아니라 더 졸음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서도 비몽사몽 정신을 차릴 수없었다. 두 시간을 더 자버리는 바람에 회사에 지각까지 했다.

잊고 싶어서 약을 먹기 시작했는데 아직 일상을 보낼 때에는 생각이 멈추진 않는다. 오늘은 하루종일 헤어진 H가 보고 싶어서 회사 화장실에서,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힝, 하고 조금 울었다. 보고 싶지만 잊으려고 이렇게 노력하는 것도 슬프고, 노력해서 정말 잊힐까 봐 슬펐다. 잊히면, 어디로 갈까. 분명히 있었던 것이니 어딘가로 가겠지. 그 어딘가가 궁금해지지 않을 때가 내가 너를 다 보낸 뒤겠지.

받은 지 2주가 되어가는 스토크 꽃에 잔향이 묻어있다. 꽃과 잎은 이제 다 시들었는데 향이 오래 남는다. 집에 와서는 보고 싶은 마음에 시든 꽃에 코를 박고 오랫동안 향을 맡았다. 이 꽃을 오래 좋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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