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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 내가 주장한 자유에 나는 오히려 구속되지 않았던가.

by Summer_bom 2016. 9. 13.

심지어 애착과 호감도 ‘좋아요’의 형식으로 세어진다.
(…) 셀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p.165)

 

<피로사회>를 읽고 주저없이 그의 책을 모두 구입했다. <투명사회>는 한국에서 발간 된 그의 책 중, 3번째 책이다. 아쉽게도 한병철은 강연은 잘 하지 않아서 이미지로써 그를 접하기는 어렵다. 그가 경계하는 ‘이미지’라서 일부러 출연을 꺼리는 것일까?
얇은 책이었지만 곱씹고, 메모하고 싶은 내용도 많아서 읽는데 오래 걸렸다. “투명성은 이데올로기다” 그가 초반부터 외친다. 그리고 그 이유와 현상에 대해 열거한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현 시대에 대해 먼 관점에서 바라본다.

쉽게 읽히는 책은 분명히 아니지만, 자신이 우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겠지. 그들은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할 수 없어서’ 우울하다고 책에서 말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착취하며 자유롭다고 느끼기에 우울증은 동반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디지털이 있다.
이 책을 통해서 <피로사회>를 읽었을 때 보다 좀 더 디지털 사회에 대해 면밀히 생각하게 된다. 디지털의 출현은 투명성의 대두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시간’이 우리에게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스스로에게 쫓겨 게으름 따윈 피우기 두렵다면, 자기계발서의 자기 강화식의 명언보다, 시스템으로 면밀히 파악해볼 수 있다. 난 한병철의 책을 보며 안심이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곱씹는 문장은 메모를 했지만, 한 줄의 글로는 ‘맥락’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설이 아님에도 그의 책은 서사적이다. 우리는 프로세서의 끝없는 작동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프로세서는 이야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종결할 줄도 모른다”(p.67). 타임라인으로 스크롤되는 삶이 아닌, 서사적인 삶에 대해, 읽는 내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피로사회>의 연장선이라 신선하진 않다. 그래서 더 자연스러웠다. 평소에 구름 위를 떠다니던 의심과 생각들을 붙잡아 주게 만드는 책이다. 나의 얕은 사색을 더 깊게 파고 들게 해주었다. <투명사회>에서 나를 억누르려는 투명성을 면밀히 볼 수 있게 되었다.

 


 

필사

투명성은 이데올로기다.

실증과학에는 무엇이 존재하는지,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 지를 결정하는 결단의 부정성이 없다. (p.23)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를 부정성이다.

자신에 대한 투명성은 이성의 특징이다. 그래서 이성은 놀지도 않는 것이다. 이성은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일한다. (p.41)

어떤 서사적 가상도 없는 경우에 끝은 언제나 절대적인 상실, 절대적인 결핍일 수 밖에 없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주민들은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
(…)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분노는 기존의 상태를 중단하고 새로운 상태를 시작하게 하는 능력이다.

아름다운 사진이 보여주는 이상적 이미지가 그들을 더러운 현실에서 지켜주는 것이다. (p.154)

심지어 애착과 호감도 ‘좋아요’의 형식으로 세어진다.
(…) 셀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p.165)

디지털 매체는 실제로  “인간의 힘을 벗어나”있지 않은가? (p.189)

진정한 의미에서 행동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해체되어 버렸다. (p.203)

정치는 뮤즈다.
(…) 사람들은 쇼핑하듯 선거한다. 그리하여 “뮤즈”는 곧 쇼핑임이 드러난다.

빅데이터가 빅 브라더의 자리를 차지한다.
(…) 모두가 모두를 감시한다. 모두가 빅 브라더이고 모두가 수감자이다.

상관관계가 인과관계를 밀어낸다. 왜 그런가 라는 질문은 그냥 그런 것이라는 확언 앞에서 의미를 잃어버린다.
(…) “데이터만 충분하다면 숫자가 스스로 말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