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대심문관의 전설을 끝내지 못한 미완의 대작

readingcats 2016. 9. 13. 23:12

영원히 이렇게, 한평생 이렇게 손에 손을 잡고 말이죠! 까라마조프 만세!

 

고등학생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다. 당시에는 완독을 했다는 자체가 중요했다.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고.. 다만 느꼈던건, 철저히 사람의 심리를 파고들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 그 문체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호. 그는 톨스토이를 대단히 존경했다고 한다. 하지만 톨스토이와는 다른 색깔을 가졌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서 나는 그의 단호하고도 힘이 넘치는 문장에 홀려 3권이나 되는 장편을 쉽게 읽었다. <죄와 벌>과 달리 이 소설에서는 여러 주인공들이 나오고 대립하는데, 그 대립의 긴장이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기대와 두려움을 공존하게 하는 소설.

까라마조프 가문을 중심으로, 개인으로 따진다면 막내 스메르자코프를 중심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아버지인 표도르 까라마조프 아래로 모두 배다른 3형제가 있다(알고보면 4형제지만). 내가 가장 매력을 느꼈던 인물은 장남, 드미트리 까라마조프다. 전반부엔 그의 역할이 돋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시마장로를 복선삼아, 후반부엔 태풍의 눈처럼 그가 소설의 중심에 선다. 아버지 표드르를 가장 닮아, 그에겐 항상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 그 위험을 토지삼아 사건이 일어나고야 만다. ‘친부살해범’이라는 타이틀을 가졌지만, 그는 소설에서 제일 솔직하다. 담백하지 못한게 죄라면 죄다.

두꺼운 책 3권이라는 단순한 이유때문에. 읽는데 한 달정도가 걸렸다. 다시 읽으려면 더 오래는 아니지만 오래 걸릴 것이다. 그래도 단락별로 나누어져 있어서 읽고 싶은 부분을 골라 읽을 만하다. 가장 소장하고 싶은 부분은 가장 유명한, <대심문관>. 이반이 철학, 종교, 인간성을 놓고 갈등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갈등이 최고치에 달하는 부분이다. 그는 3형제 중 둘 째답게, 가장 이념의 갈등이 심하다. 겉으로 보기엔 첫 째, 드미트리가 불안한 인물같지만, 이반은 내적 갈등의 줄에 아슬아슬 서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꼭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유럽과는 다르게 러시아 문화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러시아인들이 가진 내면에 대해 알 수 있다. 물론 일반화시키기란 어렵지만, 위대한 작가가 쓴 소설이기에. 사람의 묘한 심리선을 감정과 이성을 섞어가며 실감나게 표현한 문체를 몸으로 느끼고 난 후, 그 후로 러시아 문학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시대의 정신과 역사, 분위기를 간접경험 할 수 있는 건 역시 그 나라와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이지 않을까. 위대한 스토리텔링이란 상대방이 몸소 느끼는 경험이란 걸 느끼게 되었다.

추리소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심리묘사로, 그 긴장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은 변비같다 (..;;). (알고보니)미완성 대작답게,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한 가지의 이념은 끝내 물음표로 끝나고 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격히 충돌하는 이념을 대표하는 인물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다.
나는 <죄와 벌>보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서 작가의 내면 충돌을 더 잘 읽을 수 있었다. 그가 그 당시에 가졌던 상충된 원리들은 그 시대가 가졌던 이념의 충돌이다. 신과 종교를 향한 논쟁, 그리고 인간의 본성. 결국 서양은 ‘죄’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느꼈다. 하지만 처절하게 신과 충돌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에서 인간의 진화과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필사

현실주의자를 신앙으로 이끄는 것은 기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얼리스트에게는 기적으로부터 신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기적이 나오는 것이다.

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런 생각이 인간처럼 야만스럽고 사악한 동물의 머리에서 떠올랐다는 거야. 그런 생각은 그만큼 성스럽고 감동적이며 현명한 것인 동시에 그만큼 인간에게 명예를 안겨주기도 하지. 

세상은 어리석음 위에 세워져 있고, 그것이 없다면 세상에는 아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몰라.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아는지 알고 있는 거라고!

사람들의 자유를 지배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들의 양심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뿐이라오.

우리들은 그들이 우리들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고 복종할 때에만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설득할 것이오.

양심은 그들의 가장 고통스러운 비밀어어서

어머니의 집에서 내가 가져온 것은 귀중한 추억뿐입니다.

왜냐하면 권리를 주었으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미처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열망했던 것은, 정의,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정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고요만이 흐르더라>. 무슨 까닭에선지 그의 머릿속에 이런 시구가 떠올랐다.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가야만 해. 그걸 받아들이겠어!

<나는 존재한다! 온갖 고통 속에서도 나는 존재한다, 고문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서도 나는 존재한다! 형틀에 앉아서도 나는 존재한다. 나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태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한테 이런 선행이 있다면, 중국 사람한테는 다른 선행이 있겠지. 그러니 상대적인 거잖아. 그렇지 않니? 아니면 절대적인 것일까? 정말 어려운 문제야!

비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호산나만 있겠지. 하지만 인생은 호산나만으로는 부족한 법이야.

당신이 없으면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사건들은 일어나야 하는 거야.

<그 누구에게도 죄를 돌리지 않기  위하여 나의 자유 의지와 나의 희망에 따라 목숨을 끊는다>

영원히 이렇게, 한평생 이렇게 손에 손을 잡고 말이죠! 까라마조프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