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알베르 카뮈 : 어쩌면 가장 순수한 이성, 그래서 낯선.

readingcats 2016. 9. 13. 23:07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알베르 카뮈가 하는 강의를 듣고 싶어졌고, 그와 대화하고 싶어졌다.
<이방인>에서 카뮈는 인간의 본연 자유를 두려운 존재인 이방인을 통해 그려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살인 동기에 대해 말이 많다. 오역으로 인해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사실 난 그 살인 동기가 그렇게 인상깊지는 않았다.
내가 느꼈던 감동은 지성의 단일, 확실함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그와 같은 ‘이상한 이방인’으로 보진 않을까. 그렇다고 해도, 나에게 뫼르소는 굉장한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를 이 소설을 통해 만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고, 또 만나고 싶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동감도 하지 못하던 그가 궁금해졌다. 나의 감정으로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의 생각에서‘그 생각은 틀렸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것.

우리가 흔히 하는 오해에 대한 부조리로 받아들였다.
단 한 번도 진중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면서, 남의 ‘자유 의지’를 그렇게 단순하게 처벌해도 될까.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이성보다 감성이 더 앞선다고 말할 것인가(물론 난 감성이라고 대답할 것임..). 그 이유에 대해 성찰을 하게 한 <이방인>. 순식간에 읽어버릴 분량이지만, 결고 생각은 마지막 장에서 멈추진 않을 것 같다.

여러모로 잘 갈아진 송곳같았다. 내 편견, 감성, 이성.. 여기저기를 콕콕 찔러대는. 알베르 카뮈 <이방인>을 통해, 성찰이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또 다시 느끼게 되었다. 정말 철학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난 겉돌기 생각만 해왔지, 사유라느니 성찰이라느니.. 그런 깊은 생각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음을 다시 느낀다.
하지만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함께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만들어지게 되어서 좋은 독서 경험이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경백(敬白).’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말하는 신, 사람들이 선택하는 저마다의 삶, 그들이 고른 운명이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뭐가 중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