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만 헤세: 선과 악, 그리고 아름다움을 위한 시도
그 길이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곧바로 니체가 떠올랐고, <그리스인 조르바>와 겹쳐졌다.나는 어쩔 수 없이 ‘부정하는 것들’에게 끌리나보다. 이건 타고남일까 환경탓일까 생각해보면 타고남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반항과 부정으로 세상을 이해해왔다. 그리고 <데미안>속의 싱클레어도 그렇게 성장한다. 한 인간의 성장기가 아니라 그 시대의 성장기라고 보여졌다. 1차 세계대전 속에서 치뤄진 헤르만 헤세의 그 나름의 치열한 고독과 사색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책이 미완성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완결’이라는 것은 없겠지만, 이제 막 그 사람의 생각을 맛보고 있는데 소설이 끝난 느낌.
작가와 대화하며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린 떨어진 시공간에 있지만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또 다른 생각을 나누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런 대화를 계속 이어가고 싶어서 허리가 뒤틀리지만 손에서 놓지 못했다. 나는 ‘싱클레어’가 되었고, 책 <데미안>은 ‘데미안’이 되었다. 데미안은 주인공이 만나는 이상, 꿈, 또는 현실 속의 인물이다. 나는 그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인 인물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대화하다가 보면 인간을 단면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보게 된다.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이반 까라마조프가 자꾸 생각났다. 선과 악, 종교와 신, 그리고 인간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한 이반에게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데미안>속 ‘데미안’의 사색은 아쉽게도 그 시대에 머룰러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이반의 생각을 투여하며 데미안과 함께 고민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신랄한 분석과 묘사를 통해 그의 고민을 드러냈다면, 헤르만헤세는 비유를 통해 멀리서 둘러가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내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읽힐 것 같다. 마치 시처럼.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지 않아서, 그때 그때 꺼내 읽으며 나에게 다른 관점을 제시해 줄 것 같다. 정말 <데미안>은싱클에어의 ‘데미안’의 역할을 나에게도 해줄 것 같이 믿음이 간다. 왜 책 제목을 <데미안>으로 했을까 생각했는데, 그는 나에게도 상징적인 ‘데미안’으로 남아 있다.
데미안에게는 이상하게도 큰 끌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주인공, 싱클레어의 빈틈이 좋았다. 그는 유년기로 비유해서 말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유년기와 같은 시절을 지금도 보내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특히 싱클레어처럼 가정에서 추구하는 하나의 ‘도덕’이나 ‘규율’이 있는 경우. 또는 조금은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자라는 경우.
벗어나지 않으려는 사람도 보았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도 보았다. 그리고 그 발버둥에서 성공한 케이스에서는 주로 ‘독립’으로 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경제적 독립. 나는 발버둥도 쳤었지만, 사실 나에게 강요한 하나의 도덕이 없어서 ‘자신의 판단’에 더 많이 의지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그러한 경우를 보기 드문 것이 사실이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흔한결정장애의 하나의 이유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싱클레어에게 가장 짜릿했던 순간은, 그가 ‘거부를 표현’한 순간이다. 그건 유년기의 단순한 반항을 넘어선 도약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성장이었다. 그는 이제 스스로 결정할 수도, 판단할 수도, 자기 것으로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을 니체의 사상이나 <그리스인 조르바>보다 먼저 읽었다면 신선함이 더 했으리라. 아니, 충격먹었지 않을까? 책이 쉽게 읽히는 편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동양에서는 어쩌면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지금 막 든다. 생각해보면, 동양에서는 ‘자연’이 최고의 덕이라는 것이 기본 사상의 전제이다. 알고 있건 아니건, 체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적 사고를 하는, 특히나 가톨릭이나 원죄 사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데미안>에서는 전면적으로 ‘선’과 ‘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말해버리니. 더군다나 악을 위한 예배도 있어야 한다고 선언하는 인물도 있다. 헤르만헤세는 ‘선’과 ‘악’의 논의에서 비껴나간다. 그는 ‘아름다움’을 끌어들인다. 그런 것들은 제쳐두고, 우리는 아름다운 길로 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그 아름다움이란 안일하지 않은, 불편하고도 고독한 자신과의 전쟁을 하는 길이다.
이는 니체의 충격적 선언을 통해 더 견고해진 사고다. “인간은 하나의 시도였다”라는 니체 말처럼 <데미안>속의 인물들은 시도하고 또 시도한다. 스스로가 재판자가 되기 위해. 인간이라는 존재를 나에게서 찾기 위해. 책 속에서는 니체가 최고의 인간이라 지칭한 ‘위버맨시’는 에바 부인으로 비유된다. 사실 난 마음에 드는 상징이 아니라 조금 실망했지만.. 어쨌든.
시도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인간으로. 그리고 그 존재 자체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내면을 가진 그런 시시한 인간을 찾기 위한 시도.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p.9)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제 아무리 선하다 하더라도- 덜 아름다운 것
감사한다는 것은 결코 내가 믿는 미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린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로 보였다. (p.59)
사실 그것은 그냥 편안함의 문제거든! 지나치게 편안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결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금지된 것 속으로 그냥 순응해 들어가지.
(…) 그러니 누구나 자기 자신 편에 서야 해. (p. 86)
하나의 매력, 감미로움이 있었다. 그것은 반란이며 비의였다. 삶이며 정신이었다. (p.89)
나의 목표는 (…) 행복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정신성이었다. (p.108)
나의 삶이 저럴 것이며 나의 죽음이 저럴 것이다. (p.113)
그 자신은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다. 똑같이 나이들고, 똑같이 어렸다. (p. 114)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p.123)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p.129)
내 생각들 중 어느 것도 나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 어느 것도 내가 마음대로 그 색깔을 줄 수 없었다. (…) 그것들에 의해 살았다. (p.130)
음악은 별로 도덕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저는 도덕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p.135)
철학한다는 것은 <아가리 닥치고 배 깔고 엎드려 생각하기>라고 하오. (p.138)
이 예배는 아직 옳은 것이 아니야. (p.150)
우린 인간이야. 우린 신을 만들고 신들과 싸우지. 그러면 신들이 우리를 축복해. (p.163)
한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맞서 옳을 수 있는 바로 그만큼말일세. (p.168)
나도 또 다른 그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p.172)
나는 자연이 던진 돌이었다. 불확실함 속으로, 어쩌면 새로운 것에로, 어쩌면 무에게로 던져졌다. (p.172)
제 모든 생애는 늘 길 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p.188)
그 길이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p.190)